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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이야기부터 귀 기울여야

트라우마 만드는 고통의 원인 찾아야

요즘 사람들은 고통을 당한 사람을 대할 때 대체로 자기가 느끼고 이해하는 수준에서만 바라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의 고통에는 수많은 계기와 이유가 있다. 고통이란 단어 속에는 각자의 스토리와 저마다의 깊음과 아픔이 있다. 고통을 외상(trauma)이라고 부르기 전에 먼저 고통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158명의 희생자를 냈던 이태원 참사의 트라우마를 바라볼 때도 자기가 느끼고 이해하는 수준에서 희생자 유가족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 그들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도우려면 그들이 편하게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부터 해야 한다. 그들의 고통을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최면'의 스틸 컷.

고통에서 만들어지는 트라우마

성폭행을 당한 사람을 대할 때, 다양한 요인이 원인이 됐고 피해자의 아픔이 있을 수 있을텐데도 '성'이라는 데에만 포커스에 맞춰 사안을 쳐다보기 일쑤다. 그러다 보면 원인이 어디있는지를 놓친다. 

어느 청소년 쉼터에서 연락이 왔다. 말이 없는 여자 청소년이 있는데 치료해 달라는 연락이었다. 여자아이가 친척 집에서 친척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쉼터에 오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쉼터에 사연 없는 애들이 있겠느냐마는, 그 소녀의 이야기는 특별했다.

상담심리치료에는 많은 방식이 있다. 그 가운데 말이 아닌 표현예술 치료와 같은 방식은 몸을 움직여가며 상황 속에서 말하게 하기 때문에 효과가 빠른 편이다. 그렇게 그 소녀도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소녀의 내용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가 자신의 엄마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엄마가 어떤 남자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을 소녀가 봤고, 그 사실을 아무 생각없이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런 후 아버지는 엄마를 죽였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집안이 온통 피바다였다. 그 때 소녀가 겪었을 충격은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말했기 때문에 엄마가 살해된 것은 아닐까?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충격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소녀를 생각의 순환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를 트라우마라는 말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이는 사안에 비해 너무 안이한 접근이다. 공포스런 생각의 순환을 끊기 위해 소녀는 약을 먹기도 했지만 치료되지 않았다. 생각의 순환이 잠시 작동을 멈출 뿐이었다. 조금 지나면 다시 끝없는 고통스런 생각의 순환 속에 빠져들어가 제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그녀는 사건 이후 친척집을 전전했다. 아버지가 없었기에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삶은 정상적일 수가 없었다. 성폭행을 당하든, 성추행을 당하든, 돈을 뺏기든, 자신을 둘러싼 모든 보호막이 사라진 채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녀를 치료하기 위한 역할극이 시작됐다. 그녀의 입을 상징하는 빨간 방석을 앞에 두고 시작했다. 빨간 방석이 자신의 입이라고 감정 이입을 시켰는데, 빨간 방석이 입을 열려는 동작을 하는 순간 소녀는 '악'하는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창문을 향해 돌진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입을 열어 말을 하면 엄마가 죽는다'는 트라우마에 빠져 입을 여는 자신이 또 불행을 맞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을까. 그녀는 죽기 위해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발악을 했다.

그녀는 제압하려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칠 만큼 거친 에너지와 힘을 발산했다. 한참 지나 진정되고 난 다음, 역할극의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또 발악하면 진정시키는 식으로 3시간 이상을 씨름했다. 그녀는 구역질까지 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토해 내고 있었다.

원인을 모른 채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영화 ‘죄 많은 소녀’에서 주인공 영희(전여빈 분)는 친구가 실종되자 가해자로 지목받는다. 친구의 엄마도, 경찰도, 선생님도 범인이 아니라는 주인공의 말을 듣지 않는다. 친구들까지도 실종된 친구를 이 주인공이 죽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은 하나같이 주인공에게 책임지라고 요구한다. 그 말인즉 너도 ‘죽어라’는 것이다. 

영화 '죄 많은 소녀' 스틸컷

주인공 영희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 위해 약을 먹고 괴로워하며 피를 토하기도 했지만,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대신 말을 못하게 됐다. 사건이 벌어진 뒤 실종된 친구가 시체로 발견되고 유서를 통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 밝혀진다. 상황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영희의 책임이라고 손가락질 하던 친구들은 영희가 교실에 들어오자 박수를 치며 환영한다. 그 앞에서 영희는 수화로 “나는 여러분이 기다리던 나의 죽음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한다. 누구도 그 수화의 말뜻을 모른다.

친구 엄마는 딸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음에도 영희에게 원인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다 영희로부터 원인이 엄마인 자신에게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칼로 주인공을 죽이겠다는 행동을 서슴지않는다. 자식의 죽음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통의 원인을 모를 때는 모두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며 이기적이 될 뿐이다. 영화는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트라우마로 이끈 고통...들어주는 것부터

트라우마란 말이 생기기 전에는, 이를 단순히 ‘신경증’이라고 명명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정신과 전문의 에이브럼 카디너(Abram Kardiner)는 1941년에 “전쟁 외상 신경증(The Traumaric Neuroses of War)”이라는 책을 통해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을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앞으로 세계 2차 대전이 발생한다면 충격에 시달리는 군인이 많이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2차 대전이 끝난 후 전체 외상자들의 40%가 정신적 외상자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후 1970년대 베트남 전쟁을 통해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Post Trauma Stress Disorder)'라는 말이 정식 명칭으로 채택된다. 

여성의 고통을 트라우마로 인정한 역사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가정폭력, 성폭력 등에 대한 연구도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사회적 재난에 대한 연구도 이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만 보더라도 세월호 사태, 광주민주화 운동, 이태원 참사 등 많은 사고가 있었다. 하나의 큰 사건은 수많은 외상환자를 만들어 낸다.

인간의 고통, 외상(trauma)을 말하기 전에 고통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먼저이고, 더 중요하다. 자신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환경, 진실을 들어주는 분위기가 고통을 치료하는 첫걸음이다. 이는 상담소나 병원에서가 아닌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태원 참사에서 큰 고통을 입은 중상자와, 자녀를 잃은 유가족들의 고통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고 있나. 진솔하게 말하고,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분위기부터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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