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738. 녹명 (鹿鳴)

'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by 사마리아인

0207.



한반도의 최남단 제주. 서울은 혹한이 한창이지만 이곳 제주는 벌써 봄기운이 느껴진다.

제주에 내려오면 아침산책을 거르지 않고 하는 편인데, 이른 아침 인적 없는 산책로를 걷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녀석 중 하나가 '고라니'다. 제주는 의외로 미개척지인 나대지가 꽤 많다. 이런 곳엔 온갖 잡초가 우거져 있어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다. 이런 환경이 오히려 이 녀석들에겐 꽤나 살기 좋은 터전일 테다.

이 녀석들의 습성이 좀 특이한데, 사람의 인적이 느껴지면 꼭꼭 숨어있을 법도 한데 오히려 불쑥 튀어나와 깜짝 놀래킨다거나, 어떨 때는 저 멀리서 빤히 나를 쳐다보며 눈을 맞추다 사라지기도 한다.

이 녀석들의 생태를 잘 알진 못하지만, 생긴 모습만큼이나 어딘가 귀엽기도 하고 신비로운 구석이 있다.


사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고라니와 노루, 사슴의 차이를 잘 몰랐다.

심지어 고라니와 노루는 같은 녀석을 호칭만 다르게 부르는 것이라 생각했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고라니'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로드킬의 대명사로 '신호를 무시하고 무작정 도로로 튀어나오는 사람'을 지칭하는 은어로도 쓰인다.

하지만 이 셋은 엄연히 다른 종이다. 사슴이야 워낙 생긴 외모가 다르니 차치하더라도 고라니와 노루의 구별이 쉽지 않은데, 포인트는 엉덩이다. 요 녀석들이 사람을 마주치면 하나같이 취하는 베스트포즈가 있는데, 언제든지 도망갈 요량인지 반대방향으로 등을 진채 서서는 고개만 180도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자세다. 자연스레 커다란 엉덩이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 하얀 궁뎅이가 보이면 노루. 그냥 갈색 궁뎅이면 고라니다. 자매품으로 노루궁뎅이 버섯이 있으니 이를 떠올리면 쉽다. 버섯 이름을 어찌도 이리 잘 지었을까. 역시나 옛 선인들의 관찰력이 놀랍다.


사슴의 생태가 궁금해져 이것저것 찾아보다 알게 된 인상 깊은 그들의 행동양식이 하나 있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들은 소리를 죽인다. 경쟁자에게 들키지 않고 오롯이 혼자 독식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동물이 있다. 바로 사슴이다. 사슴은 먹이를 발견하면 가장 먼저 목놓아 울어 동료들을 부른다고 한다. 즉,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배고픈 동료 사슴들을 불러 먹이를 나눠 먹기 위해 내는 울음소리.

이를 ‘녹명(鹿鳴)’이라 부른다.

‘사슴 록(鹿)’에 ‘울 명(鳴)’. 사슴의 울음소리를 뜻하는 이 단어는 '시경(詩經)'의 ‘소아(小雅)’편에 등장하는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왕이 어진 신하들과 손님들을 모셔 잔치를 베풀며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사슴의 울음소리에 비유해 유명한 시다.


呦呦鹿鳴 食野之苹(유유록명 식야지평)

유유히 우는 사슴 울음이여, 들의 맑은 쑥을 뜯도다.

我有旨酒 以燕樂嘉賓之心(아유지주 이가악가빈지심)

나에게 좋은 술이 있으니 잔치를 여니 반가운 손님들이 즐겁다네.


먹이를 발견하면 함께 먹자고 동료를 부르기 위해 목놓아 우는 이러한 행위를 하는 동물은 수많은 동물 중 '사슴'이 유일하다고 한다.


시니어 기획자이자 한 팀을 이끄는 리더로서 ‘녹명’이라는 단어가 유독 깊게 다가온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1.리더의 성과는 공유와 확산에서 나온다

기획자의 업무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풀밭’을 찾아내는 일이다.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틈새(Niche) 시장을 발굴하고, 남들이 찾지 못한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는 것.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리더가 된 이후부터 그의 진짜 실력은 풀밭을 발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풀밭으로 팀원들을 어떻게 불러 모으느냐가 리더의 성과를 좌우한다.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쪽에 가면 더 싱싱한 풀이 있다고 말해도 '여기도 아직 먹을만한데'라며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실무자일 때는 ‘나만 아는 정보’를 독점해 성과를 낼 수 있었지만, 리더일 때는 내가 찾은 통찰(Insight)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공유하고 확산시키느냐가 성과를 가른다.

2.기꺼이 나눌 용기가 있는가

리더의 울음소리는 팀원들에게 전해지는 ‘비전’이자 ‘동기부여’가 된다. 가장 먼저 '저기 정말 싱싱한 풀이 있으니 힘들겠지만 저기로 가서 우리 함께 먹자!'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성과가 났을 때는 그것을 혼자 독식(獨食)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생한 팀원들을 잔치의 주인공으로 세워주는 마음이다. 그것이 리더가 가져야 할 ‘녹명’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기획자의 다이어리'를 연재하기 시작한 이유도, 이를 통해 나의 내면을 기록하는 이유도 결국은 ‘녹명’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난 오랜 시간 기획자라는 업(業)을 지탱해 오며, 수많은 숲을 헤매며 찾아낸 작지만 귀한 풀밭들을 혼자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까웠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격언이 있다.

기획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지 모르지만, 그 아이디어가 위대한 브랜드가 되는 과정에는 수많은 이들의 ‘합창’이 필수다.

오늘 당신은 어떤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가?

혹시 나만 배불리 먹기 위해 숨죽이고 있지는 않은가?

좋은 것을 발견했을 때 기꺼이 동료를 목놓아 부를 수 있는 ‘녹명’의 자세가 되어 있는가?

기획자의 품격은 성과의 크기가 아니라, 그 성과를 나누는 목소리의 크기에서 결정됨을 요즘 많이 느낀다.

“呦呦鹿鳴 食野之苹 (유유녹명 식야지평) 사슴이 우우 울며 들판의 햇쑥을 먹노라.”

시경의 한 구절처럼, 내가 내는 이 작은 목소리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영감이 되고, 또 다른 기획자의 풀밭을 풍성하게 만드는 마중물이 되길 소망한다.





'성공은 나눌 때 비로소 완성되고, 기획은 공유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 사마리아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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