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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봄 Oct 26. 2018

빛을 긍정하고, 그림자와는 함께 걷는다.

니체와 함께 고통을 #다시묻다

근원적으로 고통받는 존재는 그 고통의 바닥에서 지독할 정도로 냉정한 시선을 던진다. _ 발타자르 토마스


고통을 다시묻다


‘우울할 땐 니체’의 저자 발타자르 토마스는 ‘인간이 고통 그 자체를 느낄 때보다는 고통을 설명할 길이 없을 때 더 절망한다’고 적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고통에 신음한다. 생명이 왜 고통이라는 기능을 자신의 내부에 장착했을까를 고민해본다.


인간은 고통을 느낄 때보다는 고통 그 자체를 설명할 길이 없을 때 더 절망한다. _ 발타자르 토마스


  최근에 수술을 한 아내가 여전히 아프다. 회복은 더디고 통증은 여전하다. 오래 걷지 못하고 종종 쉬었다 걷고, 종종 누워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내를 보는 내 마음도 아프다. 타인의 고통에도 고통을 받는 것이 인간이다. 도대체 왜 스스로의 아픔을 느끼는 것도 부족하여 타인의 고통에도 고통받도록 인간은 디자인되었을까?



  고통이라는 자극은 우리에게 다르게 행동하란 자극을 보낸다. 그러나 때로 어떤 행동을 취해도 고통이 사라지 않는다. 원인을 제거해야 결과가 사라지지만, 제거할 수 없는 원인과, 숨겨진 원인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고통 속에서 살아갈 슬픈 운명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통은 생명이라는 빛의 그림자일 뿐이다.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 고통 또한 떠나간다. 그림자가 싫다고 태양을 없앨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것이다.

하늘로 오를 것 같은 환희를 체험하고 싶다면 또한 죽을 것 같은 슬품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_ 니체


   아내는 종종 고통을 제거하거나 완화시키려하기 보다는 고통 속에서 머물고, 고통과 함께 살아간다. 고통속에서 살면서 삶을 긍정하자던 니체 공부도 아내가 먼저 했고, 나보다 깊게 했다.


질병은 우리를 심오하게 만든다. _ 발타자르 토마스


   고통의 원인을 찾을 수 없거나, 고통을 피할 수 없을 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고통의 원인이 되어줄 희생양을 찾는다. 비난이 고통을 경감시켜주지 못하지만, 비난하는 행동으로 자신 안의 고통을 마비시키려한다. 예전엔 그런 행동이 어리석다고 비웃었으나, 지금은 종종 그렇게라도 해야했던 이들을 마주하며 슬픔을 느낀다.


다른 누군가를 탓하고 다른 누군가의 과오를 가지고 고통을 설명하고자 하는 병적인 필요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우리 자신의 상태를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다. _ 발타자르 토마스


  대표를 비난하던 직원도 슬프고, 직원들을 비난하던 대표도 슬프다. 부모를 원망하는 아이도 슬프고, 아이가 공부를 안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계속한다고 하소연 하던 부모도 슬프다. 집값을 올리는 누군가를 비난하는 집없는 사람도 슬프고, 이런저런 경비와 이자를 내고나면 남은게 없다는 노예같은 부자도 슬프다.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데는 근거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우리를 힘들게 했다고 아무에게나 화살을 돌리기 때문이다.

  고통의 원인을정확히 집어낼 수는 있지만 실제 겪고 있는 고통보다 훨씬 더 많이 부당함을 느낌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부당함의 감정은 과도하게 증폭될 수 있기 때문이다.

_ 발타자르 토마스


내가 느끼는 고통의 원인을
밖에서 찾고 절망하거나,
타인을 비난하는 손쉬운 방법 말고,
고통과 벗하며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온전함을 다시 묻다


  밤이 되면 우울함이 어둠 속에서 춤을 춘다. 어둠에서 나온 우울이 벗하자고 찾아온다. 이 벗과 함께 읽어볼만한 저자 중 니체는 꽤나 잘 어울리는 철학자다. 요즘 밤늦게 종종 꺼내 읽는 책은 ‘우울할 땐 니체’다. 제목부터 매력적이다. 지쳐있는 밤엔 이 책에 더 자주 손이 간다. 니체의 문장은 손으로 읽을 때 더 깊숙히 다가온다.

“가장 악독한 범죄자도, 가장 심한 백치조차 인간이 존재하기를 희구하는 허구적인 ‘선한’ 인간, ‘완전한’ 인간보다 더 가치가 있다.”_ 발타자르 토마스 [우울할 땐 니체]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온전하다. 부족함까지 포함에서 그렇다. 고통스런 일상까지 포함해서도 그렇다. 당신도 그렇고 당신이 미워하는 그 사람도 그렇다. 적어도 말 속에서만 논해지는 이상적인 인간상보다, 실제 인간들은 훨씬 풍성하고 따뜻하다. 체온을 잴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제 인간 뿐이다. 개념엔 온도가 스며있지 않고 그래서 온기도 전하지 못한다. 온기가 없이 온전한 인간은 허구다. 살아있는 차가운 이성으로 이상적 인간을 세밀하게 그려내 묘사해 보려해도, 따뜻한 실제 인간만 못하다.


질문술사의 다시묻다 노트 중..


  머릿속 뉴런망 몇개의 흔적으로, 온전한 존재들을 재단하는 오만함에, 나는 때로 분노하고, 때때로 나는 슬퍼한다. 그런 꼴보기 싫은 미운 인간들 조차도, 개념 속 철인보다 온전하다. 완벽함 따위에 온전함을 빼앗길 수 없다.


어떤 언어보다
어떤 이상보다
어떤 당위보다


나와 너는 온전하다.
존재하는 우리는
관계맺는 우리는
그렇게 우리는
온기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완벽하지 않은 자신도
부족하기만 하다 느껴지는 자신도
때때로 온전히 안아줄 수 있겠는가?
!




빛을 긍정하고,
그림자와는 함께 걷는다.


  아주 가끔 정말 가끔 고통에도 감사하는 이들이 있다. 그 고통을 벗삼아 무언가 창조하는 이들은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로움까지 선물한다. 니체가 그중 한명이라면, 고통 속에도 온기를 나눠주는 아내가 다른 한명이며, 벗들 중에도 그런 이들을 가끔 만난다. 그래서 나는 부끄럽고, 또 부끄럽고, 다시 부끄러워 그 부끄러움 속에서 글을 쓰고, 시를 쓰고, 질문을 만든다. 아직은 나도 살아있나보다.

‘빛을 긍정하고, 그림자와는 함께 걷는다.’


  우울한 아침에 니체 공부를 하다 떠오른 문장이다. 고통과 부끄러움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벗들에게 생의 축복 있으라!


부끄러워도 나는 펜을 들고, 질문을 끄적인다. 벗을 기다리며.




2018. 9. 26 질문술사

니체와 함께 고통을 다시묻고,

                  온전함을 다시 묻다.


니체를 공부하기 좋은 책입니다. 요즘  그림자를 마주하는 우울한 밤마다, 혹은 빛을 기다리는 새벽에도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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