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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봄 Nov 25. 2018

나쁜시

좋고 나쁨을 다시 묻다


더 나쁜 것은 그런 불가능한 욕망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실현 가능한 욕망, 합법적 욕망, 그 자신의 포기로 귀결된다.

_ 발타자르 토마스 | 비참할 땐 스피노자 |




나쁜시


어쩌다 써내려간 ㄴㅐ 시시한 시들

소리내어 읽어보다 부끄러워 덮어둔다


좋은 시라고 친구들이 보여주는

대가들의 시들을 읽다 울쩍함이 몰려든다

좋긴 좋은데 ㄴㅐ가 쓴 시가 아니다


위대한 시인들의 시는 ㄴㅐ가 끄적인

볼품없는 시들을 시시한 쓰레기로 만드는

나쁜 시다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곤

차마 펜을 들지 못하게 한다

아주 고약하게 나쁜 시다


내게 버려진 시들

감춰져 시들어가는 시들이

심통을 부리며 따진다


'그럼 우린 쓰레기 같은 나쁜시인가요?

 세상에 내놓기 부끄러운 시라면

 왜 그러게 정성스럽게 끄적이며

 왜 그렇게 몰입해서 끄적였나요?

 왜 우릴 낳았냐구요!'


아니란다

너희가 부끄러운게 아니라

ㄴㅐ가 부끄러워 그런거다.

ㄴㅐ 부끄러움을 드러내지 못하는

ㄴㅐ가 나쁜시인이다.



나쁜시 (초고)



2018. 11. 25. 질문술사

좋은 시를 다시 묻다.


시족(詩足)  : 좋고 나쁨을 다시묻다

  자신에게 좋은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듯 주려고 애쓰는 이들 보다는, 상대에게 필요한게 무엇인지 묻는 친구가 나는 좋더라. 비즈니스도 그렇고 어른됨도 그렇더라고.

  좋고 나쁨은 늘 상대적이다. 내게 나쁜 것이 네게 좋을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내게 좋다고 네게도 좋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 그래서 좋은 것이란 이름으로 강요하는 이들이 베푼 어설픈 친절이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하단 걸 주는 이들은 모른다.

  자신에게 좋은 것들을 남들에게 주려고 애쓰기 보다는, 상대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묻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겐 '내게 좋은 것'을 물어주는 벗이 좋다고 해도, 당신에겐 아닐 수도 있다. 나의 좋음과 너의 좋음은 다르고, 우리의 좋음을 만들어가는 것은 함께 머무는 긴 시간과 서로가 상대를 공감하고 배려하는 건설적인 대화를 필요로 한다.

  인류는 불안한 혼돈에서 빠져나와 안정되어 보이는 절대성의 세계를 구축했다. 절대적인 세계의 언어는 이데아적이다. 종교의 언어들이 이와 닮았다. 그리고 그 절대성의 세계에 진절머리가 난 이들이 상대성의 세계를 발견했다. 상대성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외롭다.  상대성의 세계의 언어는 해체적이다. 시인의 언어는 해체적이곤 하다. 우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호의존성의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린 ‘진솔하고 건설적인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깨닫고 있다. 새로운 언어가 필요한 시점이다. 통화는 대화를 이끌어내는 질문과 진정성과 진솔함을 바탕으로 표현하는 용기, 상대의 아픔과 비명에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씀은 아마도 그 새 언어의 주요 구성요소이리라.

  마흔이 넘어가며 나는 좋은 시를 쓰고 싶고, 좋은 벗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 좋은 벗이 되려면, '너에게 필요한 벗'이 어떤 사람일지 물어봐 주어야 하는데, 그런 질문을 하는게 쑥스럽다. 좋은 시를 쓰려면, 종종 우리에게 '좋은 시'란 무엇인지 대화를 나눠봐야 하는데, 그런 질문에 머물기엔 우린 너무 바쁘게 살아간다.

  꿈샘이 선물해준 좋은 시를 읽다가 ‘#나쁜시’를 썼다. 나쁜 시인이 되더라도 난 시를 쓰는게 좋더라. 아침부터 삐딱선이다. 우리의 좋음을 드러내는 시도 좋지만, 내 나쁨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시가 요즘은 더 좋더라. 계속 쓰다보면 가끔 좋은 시도 쓰겠지. 내가 쓴 시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인의 삶을 사는게 먼저겠지.
꿈샘의 좋은 시


시족(詩足) 초고  : 좋고 나쁨을 다시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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