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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리 삼번지 Feb 28. 2023

무(無)계획이 희(喜)계획이다.

(부제: 안녕, 30대는 처음이지? - 2. 대책 없이 살기)

#잡념_혹은_상념


태생이 그렇다.

머리를 비우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머리를 어떻게 비워? 아침에 눈뜨고서부터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뇌한다.

실상 매번 이렇게 고뇌하는 건 그 당시의 큰 문제도 아니고 일생일대의 커다란 난제도 아니다. 생각하는 걸 즐겨하는 타입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이 많은 스스로가 짜증 날 때가 더러 있다. 그냥 쉽게 결단 내리면 될 일을 플랜 A, B까지 생각해 가며 결정을 질질 끈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좋게 말하면 상념이고 다른 의미로는 잡념이다.

내가 겁이 많은 이유 중 팔 할은 잡념이리라. 상처 혹은 실패라는 결과가 두려워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겁이 많아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자라왔으니, 겁쟁이 어른으로 살아가는 게 이상하지도 않다. 어떠한 행위를 하기에 앞서, 결과를 속단하기도 한다. 30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익힌 노하우로 그 속단은 비교적 정확한 편이다. 예를 들자면 사람에 대한 기대, 직장에 대한 선택으로 말할 수 있다. 전자는 이십 대 시절 친구 관계 혹은 직장 동료들 관계에서 수없이 경험했으며, 후자 또한 마찬가지로 작년까지도 수많은 고뇌와 갈등을 거듭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싶더랬다. 그러나, 30대 초입에서 나는 결심했다. 겁쟁이 탈출하기! 이제는 그 계기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등산

등산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잡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목적지는 하나뿐, 정상을 향해 걸어가고 올라간다. 전 글에도 밝혔듯이, 나는 운동실력이 없다. 등산을 시작하기 전에도 역시나 걱정 섞인 생각이 앞섰다. 체력이 없는 내가 도전해도 될까? 싶었다. 시작은 동네 뒷산이었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으며 정상에 도달하고, 짜릿함을 느꼈다. 다음은 아차산, 인왕산, 불암산, 청계산, 북한산, 사패산. 등산하는 재미를 알아버렸다.

그리고, 퇴사를 한 이후 무계획으로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제주행 비행기를 탄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한라산. 한라산은 가고 싶은 마음 하나만으로 가기 어려운 곳이다. 등산코스를 미리 예약해야 하는데, 퇴사를 하고 나서 개인시간이 여유로워진 터라 평일 기준으로 바로 예약했다. 내가 계획한 것은 그뿐이었다. 밤 비행기를 타고 한라산 근처 3만 원짜리 숙소에서 자는 둥 마는 둥,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새벽에 일어났다. 김밥 1줄과 컵라면, 물 한병,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을 넣은 가방을 멘 채 시작된 등산이었다. 어둑한 산행은 처음이었다. 휴대폰 불빛 하나만을 의지해 발을 디뎠다. 그날의 그 공기를 잊지 못한다. 앞이 보이지 않아 어두웠지만 무섭진 않았다. 목적지는 명확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동이 트기 시작했다. 점점 주변의 나무, 돌, 하늘이 보였다. 정상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았지만 봉우리가 보이진 않았다. 힘들었지만 다리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마지막 휴식을 취한 뒤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계단을 오르고 올라 정상에 도착했다. 세찬 바람을 뒤로하고 백록담도 보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고 밥을 먹었다. 기운을 차리고 보니 멋진 전경, 그리고 그곳에 오른 내가 보였다. 제법 멋진 하루였다.



#대책

대책(對策). 어떤 일에 대처할 계획이나 수단을 말한다. 삼십 년을 살면서 대책 없이 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극한의 효율을 중요시하는 요즘말로 J형(계획형) 인간이다. 무언가를 할 때는 무조건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계획 없는 여행, 외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랬던 내가 대책 없이 살아보려고 한다.


한라산 완봉만을 위해 계획 없이 출발했던 제주 여행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대책 없이 사는 것도 꽤 괜찮구나. 계획으로 가득했던 내 인생에서 일탈과 같은 이 추억은 두고두고 잊지 못하리라. 인생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수많은 계획들은 원치 않은 불시의 사고들로 틀어지기 마련이다. 내가 원하는 계획을 모두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 불가항력에 스트레스받지 말자. 인생에 있어서 큰 목적지를 가지되, 잔가지와 같은 계획의 성공 여부는 중요치 않다. 인생의 여정 중, 삼십 대에 진입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현재 지금 행복한가? 이와 같은 도전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ㅡ그게 성공이든 실패든 중요치 않다.ㅡ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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