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성분 분석기

눈물 버튼에 관하여

by 투명물고기



눈물 버튼. 여러 이유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말이다.


나는 한국어가 있으면 영어를 쓰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컵이라는 말 대신 잔이라는 말을 쓰고, 물티슈라는 말을 물휴지라고 하고, 핸드폰은 휴대전화라고 함으로써 나의 남다름을 지키고 싶었다면 교만하게 보인다는 것을 안다. 판단을 넣지 않고 말해도 별스럽다는 말을 들을 것을. 내가 왜 이런 사람인지는 나중으로 하고, 아무튼 그렇다.



이건 스스로 임명한 예쁜 한국어 지킴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 목소리가 세상에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바꾸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이쑤시개. 불쏘시개도 아니고 이쑤시개는 치주염이라도 든 것처럼 잇몸에서 피가 흐르는 기분이고, 입안에 피맛이 맴도는 기분이다. ‘이깔끔이’ 정도면 어떨까? 더 고민하면 더 효능감 있고, 반박의 여지를 주지 않는 말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편으로 상황을 멋스럽게 비틀면서도 본질을 꿰뚫는 비유적이기도, 풍자적이기도 한 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좋아한다. 만들어낸 것이 상대방 무릎을 치게 하는 개운함, 굳은 얼굴이 풀고 파르릇 웃게 하는 성공적 타격은 내게 황홀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눈물 버튼’을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버튼이 영어긴 하지만, 바꿀 수 없는 한국어가 없으니 통과. 그렇다면 언제나 눈물샘을 쥐어짜는 신호가 된다는 의미의 ‘눈물 버튼’이 비트는 힘이 부족한가 하면 그렇지 않다. 어느 때고 울게 만드는 핵심의 것, 자기의 취약한 어느 부분을 말하는 빗대어 말하는 감각적인 표현. 이건 인정이다. 그런데 왜? 아마도 내가 선점하지 못한 맛스러움이 서운해서 그런 것 같다. 그렇다. 나의 시기와 아쉬움이 ’눈물 버튼’에 대한 인정 수위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렇게 온전한 인정으로 끝내는 것은 내가 아니지. 눈물 버튼이라는 말 대신에 웃음, 버튼 폭소 버튼, 용서 버튼이라는 이라는 말을 적극 사용함으로써 내 안의 반골을 속이고, 건전하게 재활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나는 눈물 버튼, 늘 눈 밑 애교 살 약간 아래지점인 아픈 듯 뜨거워지는 감각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나는 아직 깔깔 버튼이 자동 기능하는 때가 없고, 눈물 버튼의 체험이 잦은 사람이니까.


학생 때부터 이십 년이 넘도록 듣기만 해도 눈물 공장이 작업을 시작하는 그런 노래를 듣다가, 이제 괜찮은 줄 알았지만 아직도 여전하다. 이런 나는 보고 생각에 잠긴다. 아직도 해석하지 못했고, 된 것이 없는 그런 나인가하며 약간의 실망이 오는 순간, 익숙한 실패의 감각이 일어설 채비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런데, 이렇게 무너짐으로 가는 다음 단계로 이어지다 오류가 생겼다.


삐 삐 삐. 다음 공정으로 가는 컨베이어 벨트가 속도를 늦추며 종래에는 멈춘다. 그리고 자동화 연민 시스템이 돌지 않는 것을 감각한다.


눈물은 상황에 따라 성분이 다르고, 그리하여 맛이 다르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슬픔의 눈물, 기쁨과 감동의 눈물은 구성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양철 로봇인 나는 눈물이 날 때면 녹이 날 것을 염려하여 그 눈물에 집중하지 않고 겉을 씌울 기름을 찾기 시작하고, 물기가 새어 나오는 틈은 땜질로 메웠다. 대체 나는 왜 이렇게 오류뿐인가 왜 이토록 유약한가를 자책하면서 말이다. 솟아나는 그 습윤함이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심장의 신호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수신기 전원은 오래전에 꺼진 그대로다. 심장이 없어서 찾으러 다니는 것이 양철 로봇이니까. 그래서 그 저수지, 눈물의 재료 창고를 들여다 보고 그곳 환경을 살펴 본일이 없다.


집마다 꼭 있는 정화조도 일 년에 한 번씩 청소를 하는데, -스스로 하지 않을까 봐 나라가 챙겨준다. 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하니까 그래도 한다 - 내 감정의 찌꺼기들이 모이고, 그것을 처리해 밖으로 내보내기도 하는 내 안의 저수지이자 하수 종말 처리장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세금 내기도 돈이 없어, 아직 부과되지 않은 과태료 딱지는 고민할 여력이 없다.



나는 상상한다. 슬플 때 나오는 눈물이 더 뜨거운지, 감격에 겨워 눌려 흐르는 눈물이 끓는점에 가까운 건지. 실험이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눈물을 흘리는 순간조차, 내가 그 눈물의 뿌리를 알지 못해서 이다. 여전히 내 안에 연민이 해결되지 않아서 가슴 안의 피가 흐르는 것인지, 이제 정말로 괜찮아서 남아있던 화농이 흐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래서 눈물 성분 분석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냥 울고 싶어서 스스로 흘리는 밋밋한 눈물이 뽑아낼 때는 굳이 사용하지 않겠지만, 나도 모르게 몽글몽글인지 뭉클함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때, 분석기를 꺼내 볼에 대고 눈물 한 방울을 넣어 나를 읽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양철 로봇, 감각 실격자는 지금 웃고 있다. 지금 감각은 내 안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로, 그것만큼은 분명히 기뻐서. 그리고 임시의 결론은 이미 드러나있다고 여긴다. 연민이든 감사든, 의미가 있는 눈물의 출발지는 자기를 만든 쓴 뿌리에서 나는 것이라 다 뜨겁고 무겁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구별하고 분석하는 대신에 다 짜내고 싶은 소망을 품는 것이다. 이제 붓기가 다 내린 것 같고 통증이 없어도 안심하지 않는다. 대신 환부를 더욱 누르고 쥐어 짜내는 것이 나다. 분석이 무엇이 중요한가. 일단 다 뽑아내고 그 저수지가 생명수로 채워지기까지 환기를 통해 산소를 채워 넣고 싶다. 풀이 자라 산들바람이 불 때까지.


그리하여,

나는 때로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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