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3장 공주고객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공주고객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따뜻한 디카페인 카페라테, 숏 사이즈, 샷 추가, 두유 변경.
이게 내 스타벅스 레시피다.
사실 더 있다. 뜨겁게, 폼 많이.
나는 늘 창가에 붙은 테이블 한쪽 끝에 앉는다.
유리창 너머로 도심의 흰 햇살이 굴절된 채 비치면,
그 순간은 잠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무엇인가에 푹 빠질 때면,
그 따뜻한 차는 나에게 품을 내주는 친구 같다.
긴 우울의 터널을 빠져나온 날이면
가장 먼저 신발을 신고 이곳으로 와서 안도감을 느낀다.
이곳에는 작은 의식이 있다 — 음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이름이 불릴 때까지,
나는 오래전부터 “공주엄마” 고객님이었다.
그 이름은 언제나 내 옆에 붙은 수식어처럼 따라다녔다.
“따님이 공주인가 봐요.”
‘헐… 내가 아줌마로 보이나…’
그게 아주 싫었던 건 아니지만,
그 말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걸 그땐 몰랐다.
언젠가 스타벅스 버디가 내게 말했다.
“엄마라뇨, 언니라고 바꾸시죠?”
작은 친절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닉네임을 바꾸는 일은 나에게 새 이름을 짓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익명의 세상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구 환경을 위해 살지는 않아도,
디지털보다 아날로그를 택했다.
사람과의 대화는 문자보다 통화,
통화보다 만남이 좋은 구시대인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온라인 오픈채팅 세상에 들어가게 됐다.
거기서 나는 숫자였다.
53**, 오삼님.
휴대전화 뒷자리로 만들어진, 의미 없는 이름.
그러다 누군가 말했다.
“오삼님, 이름 하나 정해 보세요. 의미 있는 걸로요.”
처음엔 숫자였던 것이 관계로 이어졌고,
이내 나 자신이고 싶었다.
‘나는 왜 공주엄마가 되었지?’
산책길에 만나는 사람들이 ‘공주’를 부르며 따라다니는 걸 보고
“공주엄마~”라고 부른 게 내가 되었다.
왜 소중한 것에 공주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조금만 생각해도 금세 알 수 있었다.
나는 공주이고 싶었다.
시녀 역할을 맡고 있어도 늘 공주가 되고 싶었으니,
소중한 너라도 공주가 되어 살기를 바랐다.
익명의 세상에서 이름을 짓다가
나도 모르게 꽁꽁 숨겨둔 나의 본심을 만났다.
나를 공주님이라 부르는 걸 상상만 해도 쑥스러웠지만,
그 말에는 묘한 설렘이 있었다.
나는 신데렐라를 떠올린다.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빨래와 청소를 해야 하는 누더기 신세지만
그녀에게는 눈물로 키운 개암나무가 있다.
왕자님은 찾아오지 않아도,
그녀는 스스로 무도회로 달려갔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그게 나다.
누군가의 부름이 없어도,
내가 나를 부를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나는 공주님으로 살기로 했다.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도,
내 마음이 나를 그렇게 부르면 충분했다.
하지만, 스타벅스 닉네임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기로 했다.
앱을 켜고 어렵게 닉네임을 바꾸는 동안
내 손끝은 묘하게 떨렸다.
‘정말 괜찮을까. 누가 봐도 민망하지 않을까?’
그러다 웃음이 났다.
공주가 되고 싶어서, 이토록 망설이는 모습을
왕자님이 본다면 귀엽다고 여기지 않을까?
“공주님, 음료 나왔습니다아~”
내 귀에 닿을 그 멘트를 상상하며
따뜻하고 고소한 라테를 기다렸다.
버디가 내 앞에 다가와 컵을 건넸다.
“공주고객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헐… 누가 고객인지 모르냐?
공주는 주문을 하지 않는다.
세상이 그녀에게 음료를 올린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거품이 묻은 컵 뚜껑을 덮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공주 되기가 어려운 건, 공주로 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 주문을 외운다.
“공주님, 인생 나왔습니다.”
따뜻하고, 고소하고, 약간의 쓴맛이 남은 라테처럼,
오늘의 나도 그렇게 완성되었다.
나는 오늘의 나를 마침내 받아들이며,
그 향이 입안에서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