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나서인지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내리쬐는 햇빛은 뜨겁다기보다는 따사로운 느낌이 들곤 한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걷고 싶어 졌다. 한낮에는 여전히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지만 이제 조금 참을만한 날씨가 된 것 같다. 늘 더위에 쫓겨 실내로 대피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었는데, 야외에서 이런 여유로운 햇살을 즐겨보는 게 얼마만인지.
에어컨이 아무리 시원하고 쾌적하다지만 솔솔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비할 바가 못된다. 역시 날씨가 사람 기분을 꽤나 좌우한다는 말에 다시 한번 공감하게 된다.
오늘 찾은 곳은 합정역과 상수역 사이에 자리한 마포새빛문화숲이다. 딱히 볼거리나 즐길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는 제법 괜찮은 곳이다.
평소에도 인적이 많은 곳은 아니지만 평일 낮에 방문하니 한산함이 느껴진다. 네발자전거로 신나게 달리는 꼬맹이들과 곁에서 담소를 나누는 어머님들만이 적막을 깨워준다.
잠시 생각에 잠겨 공원을 걷고 있는데 잔디밭에 펼쳐진 빛이 눈에 띈다. 뒤편 건물의 그림자 덕분에 자로 잰 듯 깔끔하게 빛과 어둠이 분리되어 펼쳐졌다. 잽싸게 허리춤의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명과 암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풍경이 참으로 흥미롭다. 둘 사이를 구분 짓는 것은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와도 같다. 한 발자국만 움직이면 빛에서 어둠으로, 그리고 다시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할 수가 있었다.
대비로 인해 빛은 한층 더 강렬하고 찬란하게 느껴진다.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지 못했을 것이다.
문득 눈앞의 풍경이 삶의 모습과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빛'은 사실 어둠으로 인해 존재한다. 세상에 빛만이 가득하다면 그건 아름다움이 아니라 재앙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매일같이 선글라스를 쓰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빛과 조화되는 어둠으로 인해 우리는 찬란함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느낀다. 모두가 빛에 집중하지만 어둠 또한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삶의 과정도 같은 맥락이다. 모두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꿈꾸지만, 그 순간이 오롯이 빛나기 위해서는 칠흑 같은 과정들도 필요하다. 매일같이 행복하기만을 바라지만 그게 진짜 행복일까, 행복함 또한 감정이며 감정은 느낄 수 있을 때 존재한다. 인간은 익숙한 것들에는 감각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만약 지금 어둡고 캄캄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면 빛을 온전히 느끼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물론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앞이 보이지 않는 듯한 어둠의 시기는 찾아온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빛은 없듯이 영원한 어둠도 없다. 30년 남짓한 삶을 돌아보더라도 늘 인생에는 빛과 어둠이 교차하며 펼쳐졌다.
다음 빛이 찾아올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꾸준히, 또 열심히 나아가다 보면 서서히 솟아오르는 빛 한 줄기를 보고 감격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때가 온다면 이 글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아마 사진 속의 빛이 더 찬란하게 느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