緣 교수님의 자유로운 방식이 좋았습니다. 자유에는 한계가 없는 것처럼 학습에도 끝이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배울 내용은 정해져 있었지만 얼마든지 넓혀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공부에 대한 편견도 여러 겹 벗겨 주었습니다. 공부는 머릿속이 몸뚱아리보다 커지게 만드는 일 같아요. 저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국민이지만 제 삶에 아프리카란 대륙이 자리한다는 게 기쁩니다. 그러니 저와 아프리카 사이에 계신 緣 교수님께 감사할 수밖에요.
학창 시절, "칠칠이는 공부한 것에 비해 성적이 안 나오네"라는말을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반면 언니는 "벼락치기한 거치곤 성적이 좋네" 소리를 들었다. 자매와 엄마는 이유를 알았다. 언니는 중요한 부분만을 학습하였다. 시험 준비를 늦게 시작하여도 시험에 나올 부분만 골라 외우니 결과가 좋았다. 나는 교과서를 통으로 살폈다. 친구들이 안 읽고 넘기는 페이지도 보았다. 언니처럼 개념을 외우는 게 아니라 문장 단위로 암기했다. 준비를 일찍 시작해도 언제고 촉박한 이유였다.
'통암기' 습관은 인문대를 택한 내 생존 무기가 되어주었다. 교수님들은 선생님들과 달랐다. 시험 범위는 생략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였다. 교재 통째로 시험 범위인 경우도 왕왕 생겼다. <알아서 강의 듣고 알아서 공부하기>가 철칙 같았다. 지정 교재가 없는 수업에서는 학습 자료가 따로 올라왔다. 그 학습 자료도 남달랐다. 자료보다는 노트에 가까웠다. 필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고 필기하지 않으면 자료는 쓸모가 없었다. 중고등학생 때처럼 요점을 쏙쏙 알려주는 학습서도 찾을 수 없으니 무작정 부딪쳐야 했다.
대학을 실제로 나간 건 세 학기에 불과하다. 그전에는 코로나로 비대면 생활을 가졌다. 대면 수업이 비대면보다 전달력이 높다는 걸 이제는 안다. 다만 입학 자체를 비대면으로 시작하느라 대면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아쉬워하는 대신 적응하는 게 급선무였다. 뜻밖에도 비대면 수업은 은근도 아니고 꽤나 잘 맞았다. 실시간 줌 말고 녹화 영상으로 진행되는 수업들은 더욱 좋았다. 시간이 충분하다는 게 학습의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필기하다 놓치면 뒤로 가기를 누르면 되었고, 이해가 안 되면 다시 재생할 수 있었다. 내 공부의 평생방해꾼은 '시간부족'이(었)다.학교가 아닌 집에서 수업 듣는 것만으로도시간이 넉넉해지니 자연히 능률도 올라갔다.
가장 오랜 시간을 들인 수업들은 1학년 2학기에 수강한 프랑스 교양과 아프리카 교양이다. 두 수업은 불어불문학과 개설 강의였고 같은 교수님(이하 緣 교수님)이 담당하셨다. 그 때문에 수업 방식도 동일하였다. 주마다 자료와 함께녹화 영상이 두세 개씩 올라왔다. 緣 교수님은 시청 기간을 종강날까지로 정해 두셨고 실제 주차보다 1~2주일 앞서 영상을 올려주셨다. 아무 때나 봐도 된다는 뜻이었지만 나는 올라오는 족족 들었다. 그러다 보니 시험 전의공부시간도 2주는 더 확보할 수 있었다.
프랑스라는 국가와 아프리카라는 대륙에 대해선 아는 게 전무했다. 교수님은 친절하시게도 중요한 부분이 나오면 강조하셨지만 문외한이던 내게는 전부 중요하게 들렸다. 필기하는 학생이 아니라 서기로 임한 것처럼 토씨 하나 안 빼놓고 받아 적었다. 자연스레 시험 전에 봐야 할 양도 늘어났는데 처음 공부하는 분야니의아한 것도 많았다. 직접 찾아보고도 해결이 안 되면 질문 게시판을 이용하였다. 緣 교수님은 영상에서보다 더 세세하게 설명해 주셨기에 문답 시간은 또 다른 수업이 되었다.
시험은 킬러 문제를 제하면 중요하다고 일러주신 부분 위주로 나왔다. 통암기의 부작용인지 몇몇 문제는 틀렸다. 외우고 지나간 단락이 분명 하나, 외운 게 하도 많으니 갑작스레 떠오르지 않았다. 아쉬움은 금방 가라앉았다. 두 교양을 안 들었더라면 나는 여태까지도 프랑스와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을 테다. 과제는 짧은 보고서뿐이었고 주제 역시 자유였다. 프랑스 음식을 먹든, 아프리카 노래를 듣든 관련성만 있다면 괜찮다고 하셨다. 나는 '소설'을 택했다. '공쿠르 상'을 수상한 프랑스 소설 세 편과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문화의 새로운 장(* 민음사 소개)"을 연 '치누아 아체베' 작가의 대표작 세 권을 다뤘다. 내가 좋아하는 숫자가 3이라 3권씩 고른 거였는데 도합 여섯 권이 되자 당황도 했다. 역시 숫자에 약하다....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앞서 말했듯 시간이 많아 무사히 끝마쳤다.
그전까지 '공쿠르 상'은 이름만 들어봤고, 아프리카 문학에 대해서는 아는 게 0에 수렴했다. 교양 수업을 듣는 건 맥주병으로서 물장구치는 법 먼저 익힌 거나 마찬가지였다. 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물장구를 넘어 개헤엄도 터득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교과서와 문제집만으로 학습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학습이라는 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와도 같음을 깨달았다. 종강 후에도 서적을 찾아 읽었다. 지금은 또 다른 관심사가 생기며 머릿속에서 상당량이 휘발되었지만내게는 파일이 남아 있지 않은가!아프리카 수업을 들을 당시 정리해 둔 파일은총 53페이지다. 요점 정리 치고는 많은 양이긴 하나 내게는 1쪽부터 53쪽까지가 전부 '요점'이다. 아쉽게도 프랑스 파일은 사라지고 말았는데 이다음에 혼자 힘으로 제2의 요점 파일을 만들어 보고 싶다. 개헤엄으로도 물길을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전공자가 아닌 자의 요점도 인생의 길을 넓혀줄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