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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Sep 17. 2023

껌과 고춧가루는 정

친할아버지 이야기

  엄마와 아빠를 이어  분들 중 친할아버지도 계신다. 할아버지는 괴산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가장 크게 재배하시는 품목은 고추였다. 고추와 고춧가루를 업자에게 맡기는 대신 직접 거래하셨기에 인근 도시인 청주로 나오실 일이 잦았다. 육거리 시장은 물론 길목에 위치한 음식점들과도 연을 맺으셨다. 현재의 청주는 청원과 합쳐져 인구가 늘어났는데 그전에는 딱히 큰 축에 속하지 않았다. 청주 바닥은 좁았던 모양이다.


  고춧가루 거래처 중 어느 식당 사장님이 엄마 상사의 아내분이셨다. 할아버지는 사장님에게 아들을 소개해 줄 지인이 없는지 물어보셨다. 이에 상사분 엄마한테 얘기를 꺼내 보셨단다. 당시 엄마는 연애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지라 거절하였는데 연이은 부탁에 별 수 없이 나가게 되었다. 식당 사장님은 할아버지와 가까우셨고, 상사분도 엄마를 아끼셔서 좋인연을 만들어 보려고 하신 거였다. 즉, 주선이 성사된 원인은 할아버지의 성품과 엄마의 평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빠는 연애 때부터 결혼 26년 차인 지금까지 10점을 꽉 채우질 못한다. 1점에서 5점까지만 오간다. 이는 나 말고 엄마 기준에서다. 다만 <느리로서 바라보는 아버지>의 점수는 훨씬 높아 보인다. 어렸을 적에는 아빠 없이 엄마 하고만 친가에 가기도 하였다. 친가까지의 경로는 쉽지 않았다. 청주 터미널에 가려면 시내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괴산 터미널에 도착하고 나서는 택시를 잡아야 했다. 택시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댁에 딱 서는 것도 아니었다.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보니 오르막길도 올라야 했다. 엄마는 장거리 이동을 질색한다. 그런데도 그 코스를,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오갔으니 엄마가 시부모님을 좋아하긴 했나 보다.




  엄마는 "시아버지께선 다정하신 분이셨다"고 회상하나 내게 친할아버지는 어렵기만 했다. 친가에 들어서면 절부터 해야 됐다. 절하는 건 문제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품 안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내시는 건 싫었다. 외할머니도 친할아버지처럼 용돈을 자주 쥐어주셨다. 다만 우리가 슬슬 돌아가려 할 때 꺼내셨다. 엄마한테는 "차비 햐", 나와 언니에게는 "맛난 거 사 먹어"라는 이유가 따라왔다. 반면 할아버지는 돈부터 언급하셨다. "용돈 줄 테니 오랜만에 절 해 봐라!"라며 양반 다리로 자리에 앉으셨다. 나는 할아버지를 뵈러 온 거지, 돈 요하진 않았다. 거절했다간 타박도 들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나면 할아버지는 볼 일을 보셨고 헤어질 때까지 더 이상 말 안 거셨다. 절을 하고 두 손으로 돈을 받는 순간만 할아버지와 일대일로 얼굴을 맞댔다.


  친가에는 '쥬시 후레쉬'라는 껌과 '월드콘' 아이스크림, '피크닉'이라는 사과 주스가 동나는 일 없이 대기 중이었다. 세 품목 중 껌 아동복 주머니에들어갈 크기였다. 할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껌을 내미셨다. 별말씀 없이 툭 건네셨다. 그 때문에 가하면 주머니에서 껌 먼저 와르르 꺼냈다. 언니도, 나도 '쥬시 후레쉬'를 좋아하진 않았다. 종이에 그려진 오렌지, 포도, 파인애플 세 과일을 합친 맛이라는데 향부터가 이상했다. 문구점에서 200원에 파는 동그란 과일껌 중엔 오렌지 맛도 있고 포도 맛도 있었다. 그 맛들은 줄기차게 사 먹으면서 누런 종이의 '쥬시 후레쉬'는 쳐다도 안 봤다. 그다 보니 엄마도 할아버지가 주시는 껌만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과 주스를 챙기는 건 엄마 몫이었다. 아이스크림은 들고 갈 수 없으니 그 자리에서 먹어야 돼서 일찌감치 월드콘에 질리고 말았다. 질린 건 월드콘만이 아니긴 하다. 나는 지금까지도 피크닉을 내 돈 주고 사 마신 적이 없다.


  최근에 아빠에게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틀니를 끼셨고 할아버지의 치아도 성치 않으셨을 텐데 왜 그리 껌을 쟁여두신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이스크림 주스 달리 껌은 간식용도 아니지 않은가. 아빠는 "할아부지가 너네 나이 때는 껌이 귀했어"라는 설명부터 하였다. 귀한 껌을 원 없이 사실 수 있으니 손주들에게도 맘껏 주고 싶으셨다는 게 아빠의 주장이다. 껌을 한 통, 두 통도 아니고 박스채로 사다두신 이유가 귀했던 껌을 귀한 손주들에게 주고 싶으셨기 때문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댁은 앞뒤로 마당만 넓었다. 실질적인 방은 한 칸뿐이어서 자고 갈 공간은 못 되었다. 가로등이 설치 안 된 골짜기라 해 지기 전에 돌아가야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외할머니와는 품에 쏙 안긴 채 하루는 물론 이틀까지도 잤으니 교류의 깊이 나날이 벌어져만 갔다. 고등학생 때 친조부모님 댁크게 화재가 나서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할아버지는 병원에 계셨으나 이내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할머니 장례식 도중 할아버지가 정신이 드셨다 하여 손주들끼리 우르르 병실을 찾아간 순간이 있었다.


  작은 아버지 동네만 달랐지, 같은 괴산에 사셨다. 그 때문에 작은 아버지네 삼 남매는 내가 외할머니를 만나는 것처럼, 친조부모님을 자주 뵈었다. 쭈뼛쭈뼛 서 있는 다른 손주들과 달리, 삼 남매는 할아버지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 얼른 일어나셔야" 같은 말이 아니라 "오늘 ㅇㅇ이가 나보고 뭐라 했는 줄 알어?", "ㅁㅁ이가 까까 먹고 싶다고 난리여서" 등 지극히 일상적인 얘기를 해서 놀랐다. 동시에, 아버지를 려워만 하곤 내가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다는 데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일곱 명의 손주 중엔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 있었을 테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티 내는 법이 없으셨다. 모두에게 절을 시키셨고 모두가 질려하는 껌을 내미셨다.


  손주는 몰라도, 며느리 중 아픈 손가락은 첫째 며느리인 엄마였음을 확신한다. 할아버지는 사시사철 바쁜 당신과 달리, 가정을 이루고도 가장(家長) 역할을 안 하는 장남을 통탄하셨다. 아빠가 못나게 굴어도 엄마는 할아버지 뵈러 갔계속 예쁨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남은 갑자기 다. 안 사람들의 오해뿐인 험담이 있어서였다. 엄마는 할아버지께 친척들 자기를 뭐라 보는지는 말씀드리지 않은 채 걸음만 끊었다. 영문 모르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전화는 걸어도 왜 안 오느냐며 타박은 안 하셨다. "며느리가 되어 주어서 고맙다", "몸도 성치 않은 손주를 두 명이나 낳았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등 게 많 그러셨을 거다.


  농지는 작은 아버지가 물려받으셨다. 고추 재배와 고춧가루 생산도 이어지고 있다. 엄마의 첫째 언니이신 큰 이모 주기적으로 찾는 단골이 되셨. 일전에 외할머니께서 사주신 김치 냉장고가 괴산 창고로 간 여정이 신기하다는 글을 썼다. 고춧가루도 마찬가지다. 작은 아버지네 고춧가루가 아빠와 엄마를 거쳐 큰 이모네로 가다니, 이는 단순 판매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아니라 인맥으로 이어진 거래다. 인맥을 단단하게 만든 건 결혼이란 제도인 걸까? 그보다는 할아버지와 엄마가 사람 대 사람으로 나눈 정(情) 덕분일 거다. 할아버지는 다정(多情)한 분이 맞으셨나 보다. 할아버지가 내게 주려  도, 껌도 아닌 정이음을 이제야 알았다.


고추와 고춧가루는 딸표 요리상에 오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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