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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처럼 보이는 대학 생활

by 밀과참

휴학을 고민한 건 전공을 좀 더 의미 있게 배우고 싶어서였다.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진정한 학습을 위한 공부가 하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수업을 들을 게 아니라, 내가 무얼 '골라' 배우고 싶은지, 무얼 '골라' 배울 수 있는지 고찰하고 싶었다. 반년의 휴학 기간 동안 첫 번째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쓸데없이 휴학이나 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방패로 내세운 자격증과 대외활동에 시간이 모조리 빼앗긴 것이었다. 내 품에 들어온 성과들을 다 내던지고 싶었지만 어찌 됐든 학교엔 돌아가야 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선 대학 먼저 졸업해야 했다.


복학 이후, 목표는 '빨리 졸업하기'로 바뀌어 버렸다. 휴학 전의 비대면 생활에도 21학점(최대 이수 학점) 듣느라 애먹었는데 대면이 시작되고 나서도 매 학기 21학점을 꽉꽉 채우며 통학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참고로 휴학을 1년이 아니라 한 학기만 해서 엇학기가 됐다.

2학년 2학기: 전공 4 + 교양 3 + 대면과 비대면 혼합

3학년 1학기: 전공 6 + 교양 2 (2학점 수업 하나, 1학점 수업 하나) + 이때부터 all 대면

동기 계절학기: 교양 2

3학년 2학기: 전공 7

하기 계절학기: 전공 1 + 교양 1


국립대라 저렴하다 해도 한 학기 기숙사 비용이 교통비를 이겼다. 1인용 기숙사에 들어갈 성적도 됐지만 그럴 경우 돈은 더 내야 했다. 통학으로 맘 굳힌 지가 오래인데, 왜 통학하냐는 질문을 지겹게도 받았다. 다정한 지인들이야 내 고생이 안쓰러워 꺼낸 말이겠지만 십몇 명은 되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받으니 나도 지치고 말았다. 돈 없어서 그렇다고 말해도 통학을 어떻게 버티냐는 반응만큼은 끊이질 않았다. 악의 없는 감탄이 때로는 날 비참하게 만들었다.


학교가 위치한 지역은 고향과 지도상으로는 가까웠으나 우리 집에서 시외 터미널이 먼 게 문제였다. 집에서 나와 인문대에 도착하기까지 편도로 2시간 정도 걸렸다. 아침이나 날씨가 궂은날에는 버스가 지연되는 데다 차까지 막혔다. 1교시(9시) 수업이 있는 날이면 하루가 새벽 6시 전에 시작했는데, 3학년 2학기에는 시간표가 엉망으로 짜지는 바람에 저녁 8시가 넘어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대학은 분명 재미난 공간이다. 초중고와는 차원이 다른 학습을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이 미워졌다. 맘 편히 다닐 수 없다면 차라리 미워하고 싶었다.

첫 학기 때 정답 없는 교양 시험에 신나 하며 색다름을 감탄하던 새내기는, 미성년자 때처럼 학교 가기 싫다는 소리를 남발하는 예민한 3학년이 됐다. 대학을 좋아할 뻔했는데 끝내 좋아하지 못했다. 그래도 유일한 목표로 남은 '빨리 졸업하기'는 달성했다. 졸업 논문은 4학년 때부터 쓸 수 있다 하여 논문 심사가 남긴 했는데, 이를 감안해도 반년은 당겼으니 어쨌든 달성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더 중요한 목적을 무시한 채 달성한 목표라 딱히 기쁘지도, 후련하지도 않다.


남들과 비교되기 싫어서 전전긍긍했다.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결국엔 우리 부모님이 손가락질당한다는 게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 때문에 초중고 졸업하고 대학까지 다녔는데 그렇다고 평가가 달라지진 않는다. 조기 졸업이 결정되었을 때 조기 졸업을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어른들에게 종종 들었다. 학점을 다 채우고 난 현재는 그래서 무얼 할 거냐, 얼른 취직하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4.5 만점에 평균 학점 4.48인 성적도, 자격증도, 교수님들의 인정도, 수상 기록도, 어른들의 지긋지긋한 질문을 끊어내는 방패막이 되어주진 못한 거다. 나는 어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고, 앞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음에 패배 선언을 하겠다.


한 번은 엄마한테 진지하게 묻기도 했다. "사촌들보다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겠어." 당시 외가 사촌들은 모두 취직했는데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다. "나는 아직 20초인데 대학 졸업한 지 오래된 사람들과 왜 동등선상에서 비교를 해?" 우리 엄마는 사촌들한테 곤란한 질문은 안 던진 거 같은데.... 아무리 막내 동생(엄마) 걱정이라 해도 왜 내게만.... 언니가 속 썩인 것까지 내가 다 효도하라는 심보로밖에 안 느껴졌다.


이제는 이유를 찾으려는 것도 관두었다. 제 결핍 좀 그만 찾아내세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요즘, 그저 예의 바른 웃음을 지으며 넘기려 한다.




어른들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왜 그리 관심이 많은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친구들이 건네는 관심과 사뭇은커녕 완전 다른 의도니 불쾌한 거다. 그들의 기준에서 '잘' 사는 건지 파헤치기 위해 던지는 관심이란 걸 감지하고 있으니 피하고 싶은 거다. 정말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 해도 부모님보다도, 속내 아는 친구들보다도 더 큰 관심을 던지는 건 우습지 않은가. (우리가 그 정도로 친한 사이인가요?)


나는 무얼 위해 이리 산 걸까. 우리 학교는 지금 예비수강신청 기간이다. 더 이상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면서 개설 과목들을 굳이 구경해 봤다. 듣고 싶은 수업이 꽤나 많이 남아 있어서 놀랐지만 더 이상 대학이란 공간에 머물고 싶지 않으니 시간표를 조합해 보는 수고 또한 하지 않으리라.


대학이 준 깨달음이 하나 더 있다. 고등학생 때는 성적이 좋지 않아 몰랐는데 나는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공부머리가 없는 사람도 아니었고, 누구보다 배움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만일 강제로 대입을 준비하기 전에 대학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 먼저 알았더라면, 대학이란 공간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더라면, 대학생이 되고 나서 어른들 말에 휘둘리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대학이 내게 줄 수 있는 것들을 더 크게 누릴 수 있었을까? 가정형편 등 부차적인 요소도 감안해야 되니, 그렇다 해도 딱히 달라질 거라 생각은 않는다. 나를 위해, 부모님을 위해 아쉬워하지 말아야 한다.


고3 때 엄마가 정신 상담에 보낼 만큼 대입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이때도 나는 돈 아까워하기 바빴다.) 대학을 다니면서는 당시보다 증세가 더 심하게 나타났다. 똑같은 이유에서였다. 내 나이가 얼마나 되든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신세이니, 삶 자체를 저당 잡힌 기분이었다. (이땐 스스로 상담받고 싶었는데 마찬가지로 돈이 아까워서 그러질 못했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오려면 큰 하천가를 지나야 하는데 그 다리가 가장 벅찼다. 비가 올 때 높아진 수면을 보고는, 빠질 거면 비 내리는 날 빠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생각이 떠오르던 순간들에 날 지배하던 건 체념이었는데 체념에 젖은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님을 지금은 안다. 한 번은 이례적인 폭우가 내려 속옷까지 젖었는데 집에 들어갈 생각도 안 하고 넘쳐버린 하천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댔다. 휴대폰이 미끄러져서, 휴대폰을 잡으려고 발을 헛디디다가 빠지면 참 편할 텐데, 라는 생각이 걸음을 못 움직이게 했다.


브런치에 글을 쓴 지도 어느새 3주가 넘었다. 3주의 시간 동안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고통을 회고하는 일이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스스로 회복을 선언한 이상 슬픔에 지배되지도 않는다. 한 가지 우려가 있다면, 우중충했던 과거 서술에 읽는 분마저 우중충한 감정을 느끼게 할까 봐 죄송하다는 거다. (죄송합니다!)


휴학 생활 논하고 넘어간다는 게 쓰다 보니 정신 이상까지 밝히고 말았다. 아직 할 얘기가 꽤 남은 와중에 결론이 난 게 아쉽기는 한데, 이 시점에서 해야 되는 말이기에 튀어나온 거라 믿고 삭제하지는 않겠다.


고로 우중충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양해와 감사를 함께 전합니다. 이후부터는 긍정적인 서술이 이어질 겁니다. 힘듦이 컸던 건 정신적 문제에서였지, 학교 생활만 떼놓고 보면 재미도 컸으니까요.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찍은 사진인데 성의라곤 찾아볼 수 없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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