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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평등하게 다닐 수 없다

by 밀과참

가난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우리 집은 오랫동안 형편이 좋지 않았는데 내가 성인이 된 기점으로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매일을 보내진 못하더라도 아빠와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하게 되면서 소득이 늘었다. 1년 정도밖에 안 됐지만 아빠가 정기적인 직장을 구한 지금은 소득이 급상승했다. 엄마는 '매달' 생활비를 받고, 나와 언니는 '매주' 용돈을 받는다. 이전에도 엄마에게 달마다 용돈을 받았으니 용돈이란 개념이 생소하진 않은데, 엄마에게는 생활비가 신선한 존재이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대학 생활 사이사이에 아빠의 무직기(期)가 끼어 있었다. 미성년자 시절에는 아빠가 무얼 하고 사는지 엄마조차 알지 못했다. 모아둔 돈은 없는데 빚은 많다는 정보만 아빠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엄마의 외벌이로 의식주를 해결했으나 경리인 엄마의 월급이 많을 순 없었다. 엄마는 돈 걱정을 달고 살았다. 엄마나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집안의 모습을 통해 우리 집이 넉넉지 못한 건 알 수 있었다.


초등학생 때는 사교육도 다녔다. 유년 시절 사치의 끝판왕인 놀이 공원도 꾸준히 갔다. 이처럼 엄마는 또래가 누릴 수 있는 것들에서 우리가 배제되지 않게끔 신경 썼다. 엄마의 양육에는 평생 감사함을 느낄 것이다. 요즘은 부모의 가난을 원망하는 이들이 특히나 늘고 있는데 저마다 유년 시절이 다를 테니 감히 평가는 못하겠다. 나의 경우, 어릴 때도 가난이 싫진 않았고 날이 갈수록 별 생각이 없어졌다.


부자인 가정을 원한 적은 없었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싸우지 않는 가정은 오랫동안 소망했다. 이는 가능한 일이었으나 미성년자일 동안 끝내 이뤄지진 못했다. 가난한 가정이 행복하기란 쉽지 않다. 돈 없는 어른이 예민하지 않기란 쉽지 않으니 말이다. 가난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지만, 가난한 가정 내에서 가난보다 화목에 먼저 신경 쓴다면 자식의 성장 환경은 훨 나아질 수 있다.




아무튼, 부모님을 비롯해 어른들이 매우 안 좋아하는 게 내 <돈타령>이다. 하나 나는 돈타령도 일종의 운명이라 생각한다. 매사에 한 가지 원인만 있을 수는 없으나 편도 2시간의 통학을 버틴 것도, 성적이 되면서 교환 학생에 신청하지 않은 것도, 돈이 가장 큰 원인인 건 맞다. 대입을 준비하던 때 국립대를 쓰라 하신 건 담임 선생님이셨다. 가정형편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선생님의 혜안에는 지금도 감사드린다. 우리 가족은 다 같이 대입에 무지했다. 뭣도 모르고 친구들 따라 사립대 썼다가는 입학 전에 등록금 고지서를 받고 도망쳤으리라. 고백하자면 원서 넣을 때부터 국립대와 사립대의 접수 비용이 크게 차이 나서 사립대란 존재에 딱히 끌리지도 않았다.


내 성적으로 합격이 될까, 라는 걱정과 함께 돈이 없는데 대학을 다닐 수 있을까, 라는 불안도 찾아들었다. 다행히 대학 생활 동안 돈 갖고 '크게' 힘든 적은 없었지만 어릴 때의 순진함은 내려놓아야 했다. 대학은 유형을 나눠 지원자들을 받으니 언뜻 보면 평등해 보이나 결코 평등해질 수 없는 공간이다. 중, 고등학생 때는 같은 교복을 입고 생활하여 차이를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나 형편차를 감지할 수 있었다. 하나 대학에서는 일상적인 대화에도 돈, 돈, 그놈의 돈이 묻어 나왔다.




내 주식은 두유였다. 수업을 같이 듣는 이와 처음 대화를 나눌 때면 두유가 인상적이라는 말이 꼭 나왔다. 빽빽한 시간표 탓에 밥 먹을 시간이 없는 날도 있었지만 있다 하더라도 밥이 내키지는 않았다. 막학기에는 친구와 시간표가 거의 겹쳐 밥을 사 먹는 날이 종종 생겼는데 그럴 때면 다른 지출을 줄였다. 두유에 정착하기 전에는 점심을 싸 갖고 와 학생 식당에서 후다닥 먹었다. 반찬이 여러 가지인 도시락이 아니라 볶음밥, 덮밥 등 한 용기에 담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9시 수업을 듣기 위해선 6시 전에 기상해야 되는 내겐 그 간단한 조리조차 사치였다. 그래서 두유가 맘 편했다. 두유가 지겨울 때면, 주말에 과일 한 박스를 사 와 며칠간 나눠 갖고 다녔다.


잠깐의 공강 동안 친구들이 김밥이며 샌드위치를 고를 때 나는 웬만해선 초콜릿을 골랐다. 행사 중인 초콜릿은 꼭 있었고 보통은 2+1이었다. 편의점 김밥 한 줄과 초콜릿 3개의 가격이 비슷하니 내겐 초콜릿이 더 이득이었다. 김밥이나 샌드위치와 달리 초콜릿은 유통 기한이 길어 나눠 먹을 수 있었다. 두유 말고 사과(배가 아파서 잠깐에 그침), 방울토마토, 초콜릿도 자주 먹었다. 방울토마토와 초콜릿을 번번이 사는 것보다 두유 한 박스 사다 두는 게 훨씬 이득이라 주식은 두유로 고정이긴 했다. 누가 보면 다이어트한다고 오해할 법한 식단일지 몰라도 영양이 박살 나서 오히려 학교 다니는 동안은 쉽게 살이 쪘다. 남들은 코로나 때 살이 확 쪘다는데 집에 오래 있던 그 시절에 나는 가장 건강할 수 있었다. (주말을 비롯한 휴일엔 잘 챙겨 먹었다. 이렇게만 먹고 산 건 아니다.)


터미널-집, 터미널-학까지의 거리는 두 다리로 해결했다. 전자는 도보로 35분데 오가는 버스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걸었다. 후자는 보로 20분인 데다 버스는 많았다. 하나 20분밖에 안 되는 거리에 1,000원(마을버스)에서 1,250원의 돈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러한 생활은 순전히 나의 의지였다. 부모님은 제발 밥 사 먹으라고, 굶지 좀 말라고 매일 전화를 걸었다. 끝내는 카드 쓴 비용(내 명의의 카드는 체크카드뿐이어서 엄마의 신용카드로 해결하고 달에 두 번 꼴로 정산했다)을 받지 않겠다는 파격 선언까지 들었다. 그렇다고 행동을 바꾸진 않았다. 앞서 말한 두유며 과일도 부모님이 사주었다. 그렇다 해도 부모님 돈은 돈 아닌가. 부모님 돈이니 더욱 막 쓰고 싶지 않았다. 다 나의 만족을 위해 한 행동이었다.




부모님을 걱정시키는 것보다 힘들었던 건 사람들에게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왜 그리 두유만 마시는지, 도대체 밥을 왜 안 먹으려 하는지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선 앞의 서사가 너무 길었다. 수업 시간에 꼬르륵 소리가 날 때면 남들이 날 미련덩어리로 생각할까 봐 멋쩍었다. 당연 학교 밖에서 놀 때의 지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감성 식당 말고 가성비 좋은 식당 가자, 개인 카페 말고 프랜차이즈 가자는 말은 내 욕심이니 하지 못했다. (지금도 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과 놀기 위해서라도 아낄 수 있을 때 지출을 줄이는 게 맞았다.


왜 그리 걸어 다니는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터미널에서 내려 학교까지 버스 타고 오는 법을 친히 설명해 준 동기도 있었다. "버스가 자주 안 다니던데?"라 얼버무리다가 이후부터는 "걷는 게 편해"란 말로 회피했다. 방학에 친구들과 다 같이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저마다 살던 곳이 달라 알아서 역까지 오기로 했다. 친구들은 기차를 예매했는데 나는 버스 타고 가겠다고 하자 다들 진저리를 쳤다. 친구들은 모르는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때 우리 지역에서 곧바로 가는 버스가 있음에도 타 지역을 거쳐 갔다. 우리 지역은 우등 버스밖에 없는데 타 지역으로 가면 일반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이것마저 말했다간 괜히 정이 떨어질까 봐 감추었다.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성적이지만 국가장학금 수혜대상이라 중복으로 받질 못했다. 국장으로 등록금을 해결하니 국장을 받지 않는 학우에게 장학금이 넘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씁쓸함을 감출 순 없었다. 나 대신 전액 장학금을 받은 친구가, 자기는 그 돈이 들어오면 용돈으로 쓴다고 했을 때 머리를 쾅 맞은 기분이었다. 국립대라 학비가 저렴한 편이라 해도 그 돈은 기숙사에서 한 학기를 살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일 년치 교통비보다도 큰 금액이었다. 입학하고 누누이 대학 안의 형편 차이를 실감하기 바빴는데 그때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하기 계절학기엔 날도 더워 입맛이 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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