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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만난 다정함이여

by 밀과참

이전 글에서 편의점 김밥도 아까워 할인 행사 중인 초콜릿을 사 먹었다는 얘기가 민망하게 돈은 많이 썼다. 대학에서 닥치고 수업만 듣기는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내게 돈이 아무리 중하다 해도, 그 속에서 피어난 인간관계에서까지 돈을 아끼진 않는다. 비대면이 이어지길 바라는 못된 마음을 한때 갖기도 했지만 만약 비대면인 채 생활이 끝났다면 지금보다 부족한 사람이 되었으리란 건 분명하다. 그만큼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경탄해 마지않던 수업들처럼 큰 배움을 주었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은 실제 내 얘기다 보니 남 얘기를 돌려 말하기가 어렵다. 소설을 창작하며 세운 제1의 신조가 <타인의 얘기는 단 한 줄도 써먹지 않는다>이기에 남 얘기를 꺼낼 때면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우중충한 글에서 언급했던 이들에겐 괜스레 더 미안해진다. 그들이 내게 악의를 갖고 행동한 게 아닌 데다가 비참함이 그들의 말로 인해 발현되었을 뿐이지, 보다 정확한 원인은 스스로 지닌 결핍 때문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좋은 사람이고 그러한 좋음을 애정해 마지않기에 상처받지도 않았다. 비참함은 순간에 그쳤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알게 된 이가 지금 가장 친한 동기이다.


1학년 1학기가 시작되기 전 에타에 처음 들어갔다가 <ㅇㅇ학과 신입생인 사람!>이란 글을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저요!>라고 댓글을 달았는데 곧장 답글이 달렸다. 카톡 아이디를 공유하자고 했다. 순간 잘못 걸렸다는 불안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답이 없자 먼저 카톡 아이디를 알려 주었고 검색하니 동성의 앳된 얼굴이 떴다. 이러다 이상한 사람이 나인 척 연락할까 봐 불안한 마음에 카톡 아이디 저장했으니까 얼른 댓글 지우라 말했다. 그로부터 한 학기를 넘어, 일 년을 넘어, 삼 년도 넘은 지금까지 카톡을 주고받고 있다. 당연 연락만 하는 건 아니고 겹치는 수업이 부재해 공강이 안 맞더라도 꾸준히 만남을 가질 만큼 소중하디 소중한 친구다.


초반에는 친구의 호의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스무 살 때도 인간관계가 어렵기만 했는데 이 친구는 틈만 나면 내게 선물을 주는 게 아닌가. 의도가 짐작이 안 됐다. 생일 선물은 물론, 수업 관련해서 무얼 묻기에 답해줬더니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며 기프티콘을 보냈다. 답은 1분도 안 걸렸는데! 코로나 눈치 보다가 만났을 때도 선물 먼저 내밀었다. 무언갈 툭툭 주는 행위가 친구의 애정 표현 방식이란 걸 늦게 깨달은 게 여전히 미안하다. 나도 친구를 아끼는 만큼 친구를 만날 때면 빈손으로 나가지 않는다. 내게는 다정을 그리 베풀면서 내가 주는 크기 상관없이 놀라며 팔짝 뛰는 반응도 소중하다.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의 나는 생일에 한해서만 지인들에게 연락했다. 친구의 순수한 호의를 지켜보며 나도 마음을 표현하는 데 적극적이게 됐다. 브런치에 몇 번 편지를 올린 것처럼 현실에서도 편지는 자주 쓰는 편이다. 생일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쓰고 그 외의 경우에도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편지를 건네고 본다. 내향성은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말보다 글이 편하기에 소중한 이들에게 온전한 진심을 표현하고 싶은 욕심에서다.




식비며 교통비를 줄여도 이 없는 건 친구들 사이에 오고 가는 마음이 때때로 물질로 나타나서다. 돈이 아무리 중한들 어찌 받고만 있으랴. 내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타인을 위해 돈을 쓸 때는 아까움도 잘 안 느껴진다. 이 친구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내게 돈을 참 자주 쓴다. 특별대우가 아니니 도취에 빠지진 않는다. 내가 모르는 지인들에게도 평등히 그럴 테지만 어찌 됐든 나까지 챙겨주니 고마움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간다.


대학 인연은 아닌데 '다정함'에 이 친구가 빠지면 섭하다. 가장 최근에 만난 건 고등학교 동창이자 절친이다. 시내 갈 일이 있다며 나올 수 있느냐기에 얼굴 보러 나갔더니만 집게핀을 내밀었다. 한 달도 더 전에 같이 소품샵 구경 갔다가 내가 귀엽다고 했던 핀이었다. 누구 생일 선물을 사러 해당 소품샵 간 김에 그 일을 기억해 내곤 내 선물까지 사 온 거였다. 저번 주에도 고등 동창 둘을 만났는데 고양이를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는 두 친구는 둘 다 고양이 키링을 슥 내밀었다. 한 친구는 오랜만이라고 인사하자마자 내밀어서 웃겼다. 내 낡은 지갑에 반짝반짝한 고양이가 두 마리 달려 특별함이 더해졌다.


직전 학기에 학과는 다르지만 수업을 같이 들은 두 사람과 팸을 만들 정도로 가까워졌다. 동갑 친구, 언니, 나까지 총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니는 내 계절학기가 끝나는 날에 맞춰 더위를 날릴 미숫가루와 속이 꽉 찬 샌드위치를 사들고 <마지막 시험>을 응원해 주러 왔다. 언니가 바쁜 걸 잘 알고 있기에 같이 점심 먹자고 연락 줄 때부터 고마워서 방방 뛰었다. 언니의 다정에 심장박동이 거세져 땀까지 날 지경이었다. (진짜다.) 동갑 친구는 계절학기가 끝난 날 밤에 대뜸 선물을 보냈다. 정식으로 졸업하려면 반년 넘게 남았는데도 그간 수고했다면서 <졸업 축하 선물>이니 받아달라는 연락이 내 눈썹을 팔자로 만들었다. 심지어 친구는 계절학기 3주 동안 매일같이, 조금만 더 힘내라는 응원을 던져 주었다.




끝으로 한 사람만 더 소개하겠다. ㅎㅎ 이 또한 학과마다 차이가 있는데 요즘은 술을 강요하지 않는 추세이다. 내가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 걸 아는 학과 언니는, 술이 끼는 자리(학과 행사 등)에 내가 있을 때면 날 먼저 살펴주었다. 술 대신 무얼 갖다 주냐는 게 언니가 내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 아닐까 싶다. 언니는 학교 다닐 때에도 살뜰히 도움을 주었는데, 유학 가면서까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해 주었다.


이 애틋한 사람들은 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학점을 다 채우기까지 심히 불안에 떨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밝힐 생각도 없다. 내 결핍을 모른 채 던지는 순수한 마음에 흠을 내고 싶지는 않다. 이들과의 교류가 없었더라면 등하굣길에만 울 게 아니라 학교 안에 있는 동안에도 외로움에 시달려 허망했으리라. 논한 사람은 몇 사람에 불과한데 대학이란 공간에서 통성명을 나누고 웃으며 얘기를 나눈 이들은 훨 많다. 현재까지 만남을 지속하든 그렇지 않든, 그 순간에 그들이 내게 내민 다정함은 잊지 못할 터이다. 고마웠어요!


어쩌면 좋나. 성공할 생각이 없는데 이들의 마음에 보답하려면 대기업에 들어가 억대 연봉을 받아도 모자랄 판이다. 글 중간중간에 과장처럼 느껴지는 문장들이 이들에겐 진심으로 다가온다면 바랄 게 없다. 나의 과장은 애정을 논할 때만 나오니까.


인간관계는 암담한 생활에 지쳐 쓰러지지 않게끔 생기를 유지하는 자양분 역할을 했다. 대학 간 게 후회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도 이러한 교류를 통해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이들 중 한 사람의 다정만 첨부하기엔 아쉬우니 아무런 관련 없는 사진을 집어 넣겠다.




※ 참고 - 예비 대학생만 읽으시면 됩니다 ※

예비 새내기분들은 주의하실 게 에브리타임이란 어플에서 사람 만날 생각은 결단코 가져선 안 된다. 아무리 같은 학교 학생이라 한들 익명에 기대어 친해지자 말하는 이들은 경계부터 하고 봐야 한다. 나는 그러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좋게 이어졌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극소수에 해당하리라.


또, 에브리타임에선 제발 정보글만 얻어가시길. 학교마다 차이가 있긴 한데 HOT 게시판이란 곳조차 갈등을 조장하거나 맥락을 알 수 없는 글들이 수도 없이 올라온다. 정보글이 주가 되는 시기는 새내기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랑 수강신청 시작 전에 한정된 듯싶다. 꼭 이 시기가 아니더라도 검색 기능으로도 정보는 충분히 얻을 수 있으니 에타를 기웃거리며 시간 버리는 수고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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