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지은 Oct 22. 2020

동료 P가 생겼다

예상대로 지원 사업 대상자 선정 서류 심사에서 탈락했다. 기댈 곳이라곤 없어졌는데 홀가분한 기분이었고, 계획만 하던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저널을 만드는 건 잡지사 기자 일과 본질적으로 다른 활동이 아니어서 시작이 어렵진 않았지만, 함께할 다양한 사람이 필요했다. 아무도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작업이라면 기획에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이고, 수정하거나 아예 없던 일로 돌려도 되니까 그닥 쫄릴 일도 아니었다. 설렜다.


P를 만나러 갔다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P였다. 한 달 전 부암동에서 우연히 만나고 그녀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디자인 잡지에서 일한 적이 있고, 출판 디자인을 해봤으며, 여러 활동에 관심을 두는 사람 같다는 느낌이 한 번 본 P에 관해 내가 '아는' 전부였지만 계속 머릿속에 있었다. 주변에 꼭 P만 그런 사람인 건 아니었음에도. 만나서 프로젝트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그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라면 함께 만들어보면 어떻겠는지 물어볼까 생각했다. P에게 받았던 명함을 다시 보다가, 거기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줄곧 해오면서, 이 일이란 어떤 형식으로 담든지간에 서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닿을 만한 누군가들과 자꾸 연결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어쩌면 그게 적어도 어떤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서는 핵심이라고 생각했었다. 만나고 연결되고, 또 만나고 연결되는 시간들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 혹은 물음을 가지게 되니까. 그래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과 그걸 소비하는 사람들 각자가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고, 그건 다시 새로운 콘텐츠로 반영될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내가 P에게 말을 거는 시도도 새로운 프로젝트의 첫 번째 연결이 될 수 있었다. 혹시 P가 거절해도 그녀를 한 번 더 만나는 일은 의미가 있었다. 거절로도 연결은 될 수 있으며, P에게 그 이유라도 물어서 알면 다음 시도에 반영할 보완점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P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번호를 모를 P에게 메시지로 누군지를 밝히고, 연락 가능한 시간을 물으며 그에 대한 짧은 이유를 덧붙이는. 몇 시간 뒤 P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은 씨 잘 지냈어요?"


처음 봤을 때와 같은 상냥한 말투로 P는 딱 한 번 본 내 안부부터 물었다. 갑자기 받은 전화에 어떻게 용건으로 훅 들어갈까만 고민하던 나는 혼자서 조금 민망했다. 연결이 목표가 되는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늘 일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용건부터, 혹은 용건에만 집중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다시 확인했다. 이건 잘 고쳐지지 않는 성미 같은 건데, 나는 원래 누구와의 전화 통화도 뚜렷한 목적 없이는 잘 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전화를 건 P가 먼저 말을 걸어온 건 다행이었다.


아무튼, 그날 통화로 P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P가흔쾌히 가까운 날을 잡아줘서. 나를 만날 이유가 꼭 있는 것도 아닌데. 3일 뒤엔 카페 느닷에서 P를 또 한 번 만나기로 했다.


P와 함께 일을 만들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P를 두 번째 만난 날 우리는 함께 일을 만들기로 했다.


P를 만났을 때 막상 테이블 위에 꺼내놓은 '할 말'은 잘 정리되고 연결된 말이라기 보단 '30대' '삶' '말할 공간' '독립출판'과 같은 콘셉트의 키워드들을 엮은 투박한 이야기였는데, P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수락했다. 아무래도 P를 만나러 가는 내내, 일하고 있을 그녀의 시간을 뺏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말하려고 계속 생각한 영향이었나 싶다. 아무튼 그런 느낌적인 느낌의 주섬주섬한 전달로 잡지를 같이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했고, P는 동갑인 애인에게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보다 좋은 반응을 보여줬다. 그녀 자신도 뭔가를 같이 하고 싶었다면서. 물론 그건 나와 하고 싶었다는 소리는 아니고. 아마 P도 내 기획과 비슷한 결로 고민하는 시간을 통과 중이었던 게 아닐까. 아니면 그닥 솔깃했을 이야기는 아니었던 거 같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일을 만들기로 되었다. 2년도 더 된 시간을 지금와서 떠올려봐도, 그때 우연한 기회로 만난 P와 결속된 건 정말 재미있게 희한한 사건이다.


업무(?) 이야기가 끝나고, P는 카페의 새로운 계절 메뉴인 복숭아 셔벗을 먹어보라며 내왔다. 애플민트를 얹어서 향도 좋았던. 나도 가지고 있던 에세이 한 권을 느닷에 놓고 갔다. 표지 색감이 예쁘고 내지 질감이 기분 좋은 물건이었다. 그걸 만지면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은 없어진 카페 느닷_ 2018년 5월 21일

느닷을 나서면서 P와 다음 약속을 잡았다. 그때까지 내가 잡지의 구조를 잡고 그 위에서 1호에 담길 스토리를 구상하여 P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아주 쓸모없는 기획을 한 건 아니구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오늘 확정한 건 '독립'이라는 주제를 제일 먼저 다루자는 것, 우리의 '이야기'를 담을 '공간'을 우리 스스로 만들기로 한 것뿐이었지만 오늘 이전과 오늘 이후에 나는 다른 시간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P라는 궁금한 동료가 생겨서, 혼자일 때보다 빨리 일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았다. 나 혼자 짓는 일이 아니라는 게 정말로 기뻤다. 그동안 일을 위해 '사람'을 발견하고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은 계속 희열이 있는 작업이었다. 새로운 일을 함께할 사람이 생기자 그때와 비슷하고도 몇 배는 더 신나는 감정이 일었다.


나에게 동료 P가 생겼다.


청년 지원 사업에 떨어지고, 무작정 디자이너부터 찾아갔다.

작가의 이전글 청년 활동 지원 사업의 '미스터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