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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Nov 13. 2020

L의 '독립 고구마와 줄기'를 캐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S와 존댓말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L도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마찬가지로 앵두오디딸기빙수를 들고 나타났다. 아마 그날 앵두오디딸기빙수를 노린 사람이 많았나 보다. 하긴, 1년에 한 번뿐이니까. L은 우리 맞은편 벽돌 난간에 앉았고, S는 그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내가 만들고 있는 잡지 이야기도 곁들였다. 1호로 '독립' 이야기를 다룬다고. 나에게도 L을 정식으로 소개하며 다시 한번 독립을 말했다.


덕분에 나는 책방 회원이라는 점이 유일한 교집합이었던 L과 자연스레 '독립'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이미 S도 또 다른 지인과 이야기 중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삼> 1호는 L의 말로 열게 되었다.


L의 독립과 폭력과 사회


"저는 가정폭력으로 독립했어요."


독립에 관한 이야기를 묻자마자 L이 꺼낸 말이다. 아주 덤덤하게. 나에겐 마치 (더 듣고 싶으면) 각오하라는 것처럼, 혹은 (그래도) 계속 듣겠냐는 의미로 들렸으나, L에겐 단지 자기 맥락에서 독립이라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꺼낸 첫 마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말. 누구나 자기 생의 중심에 자기가 있고, 그것이 기본값이니, 그 기본값에 근거해서 발화했을 L의 말. 아무튼. 그 다음 말들을 듣기 위해 나도 말을 이어갔다. 처음엔 그저 길에서 만난 '평범'해 보이는 그녀 으레 질문을 던졌고, 거기서 조금 더 조금 더 묻는 일로 어느새 L의 이야기를 자꾸 끄집어내고 있었다. L의 띄엄띄엄한 말을 잡고 또 늘이고 잡고 또 늘이고, 사이사이의 맥락을 맞춰 보면서.


L의 말로 <삼>의 독립 이야기를 열어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독립을 설명하는 이야기의 시작이자 배경이었던 '폭력 일상'은 자칫 '특별한 생활'로 여겨지기 쉽다. 누구도 얼굴에 '가정폭력 피해자'라고 쓰고 다니는 사람은 없어서 내 옆에 그 사람이 있어도 마치 없는 상황처럼 존재하곤 하니까. L이 그런 것처럼.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한 해도 가정폭력이 발생하지 않은 적은 없다. 그런 '특별한 해'는 단언코 한 번도 없었다. 최근엔 검거 인원으로만 따져도 2017-2018년 4만 명대였던 가정폭력 관련 검거 인원이 2019년에 5만 9472명으로 폭증했다는 사실이 경찰청을 통해서 발표됐었다. 코로나19 사태 속에 있는 올해도 상반기에만 2만 5846명이 검거됐고, 연말엔 역시 5만 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그러니 S가 아니었다면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았을 L은 내가 길에서 지나친 수많은 또래 중 폭력에서 탈출한 독립생활을 하는 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낯선 사람 L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차차, 싶었다. 내 주변에는 이미 L과 유사한 독립 배경을 가진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옆에 두고 사는 것이 폭력인 세상이라니. 그것도 내 옆에 피해자 한둘 있는 것 쯤은 너무 익숙할 정도로 폭력이 흔한 세상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곧 폭력배들을 용인하는 사회라는 거 아닐까? 지금 신고도 검거도 되지 않은 가정폭력 가해자들은 사회적으로 헤아리지도 못한다.


L의 독립 고구마와 줄기 캐기


L이 나와 이야기를 나눈 당시는 첫 퇴사 후 처음으로 휴식기를 가진 지 한 달 여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직전까지 '빡센' 직장생활을 꽤 오래 해온 L이었다. 계속 대화하면 아마 고구마를 살살 캐고 꺼내듯이 나올 것 같은 L의 더 많은 말들을 그냥 흘려보내야 하기 전에 나는 확실히 물어보았다.


“지금 나누고 있는 L 씨의 독립 이야기를 지금 만들고 있는 독립 저널 <삼> 인터뷰로 다루고 싶은데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삼>의 콘셉은 이미 S를 통해 전해 들은 L이었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전혀 없이 L은 말했다.


"네 괜찮아요."


1호에 글을 써주기로 한 다른 사람들, 그리고 P처럼, L도 자기의 이야기가 전달되는 걸 흔쾌히 수락했다. 또 만난 거 같았다. 자기 안에만 있던 경험이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 그런 일을 기꺼이 받아주는 사람을. 그렇게 L과의 대화 시간은 예상처럼 점점 길어져서 자리를 옮길 필요가 있었다. 이미 바닥에 엉덩이만 붙이고 꽤 오랫동안 앉아 있던 터라 허리가 아팠고, 약간 움직이고 싶었다. 여기 들어설 때보다 나설 때 더 가볍게 발자국이 떼어졌다. 왠지 속도도 조금 더 붙는 거 같았다.


"우리 다른 카페로 자리 옮겨서 더 이야기할래요?"

"네. 그러죠, 뭐."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우리는 수카라에서 나와 주변을 거닐었다. 근처에서 몇 개의 대로변 카페를 지나쳤고, 어느 골목 안쪽으로 진입하다 발견한 카페로 들어갔다.


"뭐 마실래요?"

"저는 아몬드 라테요."


L에게 라테 한 잔을 샀고, 나는 자몽맥주는 주문했다. 자리를 잡은 우리 앞으로 이제 따뜻하고 차가운 것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녀 앞에서 녹음기를 켰고, 더 많은 '독립 고구마와 줄기'들을 캐기 시작했다. 고구마에는 분명 줄기가 있을 테니까.

고구마에는 줄기가 있다


“집을 나가는 날 아침에 가족들에게 독립한다는 사실을 알렸어요. 그날 아빠한테 또 맞았어요. 일전에 신고했다가 경찰이 그냥 되돌아간 지 일주일이 채 안 된 시점이었죠.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나가 살 집을 알아본 게 일주일 정도였으니까. 경찰에 또 신고하려는데 아빠가 핸드폰을 뺏어 집어던져서 액정이 박살났어요. 그 파편들이 발에 다 박혀서 피가 철철 흘렀어요. 정신없는데 신고하러 거실로 나가려다 머리를 걷어차이고, 집 전화로 112에 신고하고 지구대 경찰이 출동했죠.”

- <삼> 1호, 10쪽


물론 L의 독립 고구마 줄기를 캐는 일은 조심스러운 작업이었다. 그래도 줄기를 또 발견할 때마다 그 위치에서 또 다시 고구마로 가까워지는 이야기를 건네고 또 건넸다. 오후에 만난 L과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헤어지면서 서로 교환한 연락처를 통해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문득 그녀의 독립 공간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왜 거기까지 나아갔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거기에서 더 다양한 L의 독립 고구마들을 구경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렇지만 사적인 공간이므로, 어디까지나 가볍게 물어본 것이다. L은 수락했다.


"혹시 그래도 된다면 L 씨 집에 언제 놀러가도 될까요? 거기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요. 당연히 거절해도 되고요."

"뭐 그러세요. 지금 백수라서 시간도 있고요."

"그럼 날은 또 연락해서 잡을까요?"

"좋아요."


L의 독립 고구마와 줄기 캐기는 그렇게 또 한 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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