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엄마와 함께 마신 막걸리가 응원 같아서
지난 주말에는 엄마와 막걸리를 마셨다.
암환자와 백수가 나란히 앉아 물컵에 막걸리를 따라 부추전과 함께 먹었다.
막걸리는 내가 사두었다. 비 예보가 있는 날이라, 막걸리 한잔을 마시면 좋겠구나 싶어 장 보러 간 김에 한 병 샀다. 둘 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해 2병까지는 살 필요가 없었다. 유통기한이 긴 술이라도, 사서 바로 마셔야 맛있다.
부추전은 내가 부쳤다. 내가 딱히 엄마보다 요리를 잘해서는 아니다. 난 엄마의 요리를 별로 안 좋아한다. 김치찌개도 부추전도 나는 아주 잘게 야채를 썬다. 그래야 찢길 때 지저분하지 않고 먹기도 좋다. 반면 엄마는 큼직하게 썰어 넣는다. 싫다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도 계속 똑같이 큼직하게 썰어 넣는 요리를 하는 걸 보고 언제부턴가 내가 먹고 싶은 건 스스로 만들어 먹었다. 요리해 먹는 걸 좋아해서 다행이다. 새우나 낙지를 넣으려다 관뒀다. 왠지 깔끔한 야채맛만 느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엄마는 옆에서 전복을 씻어 쪘다. 꽤나 비싸 보이는 큼지막한 전복 5개가 뽀얗게 씻겨져 찜통으로 들어갔다. 아빠를 위해 밥반찬으로 계란말이도 했다.
한상이 잘 차려졌고, 먹지도 않을 밑반찬이 잔뜩 나왔다. 엄마집에서 먹는 밥은 언제나 그렇다. 먹지 않을 것 같은 밑반찬도 출석체크를 하듯 나와 식탁을 채웠다. 아빠는 여자 둘이 술판이 났다며 눈을 흘겼다. 아무리 암환자인 엄마와 마시는 한잔이지만, 파킨슨에 당뇨까지 있는 아빠는 도저히 끼워줄 수 없었다. 겨우 막걸리 한 병이지만 우리는 깔깔 웃으며 좋아했다.
회사를 퇴사하고, 퇴사했음을 부모님께 고백한 이후 첫 저녁이다. 퇴사고백은 지난주에 했으나, 당시의 부모님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듯 보였다. 사실 고백을 했다기보다는 들켰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소지를 부모님 댁으로 해놨는데 지역가입자로 바뀌었다는 의료보험 관련 서류가 집에 도착한 것이다. 고백인지 들켰을지 모르게 인정을 했으나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서둘러 내 집으로 후퇴했다.
한 주가 지나고 나는 한결 가뿐한 마음으로 다시 부모님댁에 왔고, 부모님도 좀 더 납득한 듯 보였다. 그리고 엄마는 자꾸 온갖 음식을 가져가라 했다. 나는 막 퇴사를 했고 아직 굶어 죽고 있지 않았지만, 엄마의 마음엔 당장 내일 굶어 죽을 것 같아 보였나 보다.
"야, 양념게장 해줄게 가져갈래? 이거 양파랑 버섯도 하나씩 가져가. 과일은 챙겼니?"
난 퇴사를 했고, 부모님은 내 걱정을 했다. 나는 마흔이 넘었지만 아직도 엄마아빠의 막내였다.
부모님으로부터 이런 응원을 받은 기억은 별로 없다. 엄마와 아빠는 나의 진로와 삶에 대해 의견이 항상 달랐고, 내가 하고 싶다는 걸 동시에 응원해 준 기억이 없다. 특히 엄마는 '여자가 많이 배우면 시집 못 간다'라는 말을 새기며 자란 어른이었다.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나, 유학을 한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반대했다. 그중 제일은 십여 년 전쯤 내가 결혼하고 싶다는 걸 반대한 일인데, 그 덕에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엄마는 나에게 빚진 마음이 있는 것 같다. 부모님의 반대는 내게 너무 큰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는 다시 돌아 그 들에게도 상처가 된 것 같았다. 그 남자를 잊지 못해서 결혼을 안한건 아니지만, 부모님은 내게 결혼에 대해서 말하기 불편해졌다.
아마도 그래서 회사를 퇴사했다는 사실을 들켰을 때도 별 말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모 이미 한 회사를 십 년도 넘게 다녔으니 좀 쉬어도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고, 혹은 마흔 넘은 딸이 회사를 그만두든 말든 말을 보태기 불편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싫은 소리를 보태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응원받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좀 말랑말랑해졌고, 막걸리가 꿀떡꿀떡 들어갔다.
다정하게 세가족이 저녁을 먹으며 나는 이 모든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놀라거나 당황스러운 딸의 퇴사를 응원한다며 하고 싶은 걸 찾아보라는 응원이 기쁘면서도 조금 씁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