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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Jan 11. 2023

엄마를 이해하기 위한 나의 노력 1

할아버지 이야기



 엄마의 인생에 할아버지는 가장 중요하고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엄마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할아버지, 엄마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도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때문에 미쳐 죽어.'라는 말을 달고 산 엄마지만, 미쳐 죽겠다는 표현은 너무 좋을 때나 감사할 때에도 자주 나오는 말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는 자수성가형 할아버지를 나에게 '백만장자'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거의 백만장자가 되신 것과 다를 게 없다고. 그날의 엄마의 자랑스러운 표정과 엄마가 이야기해 준 할아버지의 삶이 꽤나 정확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어린 나이였던 나에게도 인상적인 사건이었나 보다. '할아버지가 백만장자면 나도 부자가 되는 건가?'라는 철없는 생각을 했다. 어렸으니까.



 어려운 시절,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신 근면 성실함과 시대의 운이 더해져서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하신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르시며 어린 나이부터 홀로 성장하셨다. 벌지 못하면 먹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부모를 잃은 할아버지는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했지만 그 누구의 경제적 도움도 받지 못했기에 힘든 삶을 살아내셨다. 그렇기에 할아버지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자식들을 건사하며 살기 위해 가장 목표하셨던 건 아마도 경제적인 부를 이루는 것이었을 거다.  



 우리 집이 첫 차를 살 때도, 첫 집을 살 때도,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할 때도, 전부 할아버지의 시의적절한 도움 없이는 힘들었을 거라고 했다. 아빠의 월급이 적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댁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경제적 도움을 드려야 했었기에 엄마는 더욱 친정의, 친정아버지의 도움이 감사했다고 말했다. 피아노를 배운다는 말에 손녀인 나에게 피아노 한 대를 척 선물로 사주신 할아버지다. 언제나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정신적, 물질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신 같은 존재였다.






  러나 할아버지의 자식사랑은 일반적이지 않다. 나는 부모의 헌신과 자식에 대한 사랑, 희생과 같은 이야기를 책이나 TV드라마 등을 통해 접하게 되면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 할머니 자식을 위한 삶을 사셨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당신들의 삶을 최우선시하셨다. 자식은 그다음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모든 일에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장사를 하시던 시절,  제일 좋은 생물은 팔지 않고 따로 두셨다가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만 드셨다고 했다. 질 좋은 고기, 생선을 드시면서 '애들은 앞으로 먹을 날이 많다'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엄마를 포함한 4남매의 단골 에피소드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건강해야 자식을 지킬 수 있다. 내가 제일 좋은 걸 먹어야 한다.'라고 생각하셨던 게 아닐까.  



 장사를 마치고는 큰 딸인 엄마에게 동생들을 맡겨두시곤, 두 분은 문화생활을 즐기러 나가셨다고 한다. 목욕재계를 하고 옷을 싹 빼입으시고는 댄스를 배우러 다니셨다고 들었다. (후에 엄마도 할아버지처럼 댄스를 배우러 다니셨다. 나는 사교댄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할아버지는 부모의 내리사랑을 강조하셨다. 내리사랑이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할아버지에게는 부모의 말이 곧 법이고 사랑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엄마와 삼촌들이 나누실 땐, 거의 할아버지에게 두드려 맞은 이야기다. 때리다 지치신 할아버지는 큰딸인 엄마에게 동생들을 마저 때리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맞은 추억을 나누시며 모두 웃으신다. 나는 엄마에게 맞은 이야기를 할 때면 인상이 찌푸려지는데, 이해 못 할 일이다.

 


 엄마 나이가 40일 때, 16살인 나를 키우고 있는 엄마에게 "자네가 부모 마음을 어떻게 아나?"하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엄마 나이가 50이 넘고 심지어 딸을 결혼시킨 후에도 "자네는 부모 마음을 모른다"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10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 또한 엄마 앞에서는 아직 부모 마음을 10년 차밖에 모르는 초짜일 뿐이다. 엄마가 결혼하지 않는 동생을 걱정하는 이유는 '자식을 낳지 않아 부모 마음을 모르고 살까 봐'이다. 대체 부모 마음이 뭔지, 이 정도면 평생 아무도 모를 일 아닌가.





 

 소민이가 태어나고 삼칠일을 갓 넘겼을 때,  할아버지 생신기념 저녁식사에 가야 했다. 조리원을 나오자마자 신생아를 데리고 사람 많은 식당에 간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지만 할아버지 생신에 피치 못할 사정이란 없었다.

 

 

 소민이를 안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초보엄마였던 나. 좌식 식당이긴 했지만 1달도 안 된 아기를 식당 바닥에 내려놓는 것은 갓 장착한 모성애가 날로 커지는 무렵인 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 엄마는 소민이를 받아 들고는 내게 어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고저 애기는 내려놓으라우."(아기는 내려놓아라)



 아버지의 불호령에 엄마는 사색이 된 내 얼굴할아버지 눈치를 번갈아 보았다. 결국 소민이를 바닥에 내려놓으셨다. 할아버지는 자식 하나에 어쩔 줄 모르는 내 모습이 보기 불편하셨을 수도 있다. 그 시대 어른들 보시기에는 아이를 낳고 살려놓은 것 까지가 부모의 역할이었을 테니까. 또는 어른 앞에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 그날 역정을 내신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표정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지금까지도 할아버지가 왜 언짢으셨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엄마가 할아버지를 추억할 때면 이야기하시는 단골 에피소드가 또 있다.

"내 자식은 다 병신인 줄 알 거야."

친구분들과의 모임에서 자식자랑을 하는 친구들 이야기를 듣고 오신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라고 했다. 이 친구도 자식 자랑, 저 친구도 자식 자랑을 하는데 할아버지는 자식이 넷이나 되는데도 친구들에게 자식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셔서는 하신 말씀이다. 할아버지는 자식에게 칭찬을 하지 않으셨다. 남들에게도 자식을 칭찬하지 않으셨다. 하. 할아버지를 생각할수록 엄마가 똑 닮았다.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할아버지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엄마를 포함한 사 남매를 길러내셨다. 부모의 말에는 절대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칭찬과 인정은 물론 사랑표현조차 받아본 적이 없었을 엄마.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함께 학교를 오가신 일이, 극장에 엄마를 데리고 가셔서는 영화를 보여주신 일이, 엄마게는 분한 부모의 사랑으로 느껴지셨던 걸까.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하나도 없으시다고 하니 말이다. 엄마가 배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표현은 말로 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었나 보다.






"말 안 해도 알지?"


남편이 결혼 후에 제일 이해하지 못했던 장모님의 말다.


말은 해야 안다. 마음은 말로 표현해야 알 수 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온화하고 인자하며 따뜻했다. 특히 소민이한테만큼은 아이 같은 환한 웃음을 지어주셨다. 낯을 가리며 무서워하던 소민이도 나중엔 할아버지를 겁내하지 않았다. 소민이는 할아버지 앞에서 모든 개인기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할아버지도 소민이에게는 사랑이 가득한 표정으로 화답하셨다. 나는  평생 처음 본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소민이가 4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는 천국으로 가셨다. 소민이의 기억 속 증조할아버지는 소민이를 많이 사랑해 주신 분이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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