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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Jan 26. 2023

엄마를 이해하기 위한 나의 노력 2

엄마와 아빠



 엄마는 팔방미인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소풍날, 엄마가 준비한 담임선생님의 5단 도시락은 지금도 자주 회자된다. 내 도시락 반찬은 친구들에게 항상 인기가 많았다. 생일날 반 친구들을 초대한 생일파티에 엄마는 손수 반죽해 구운 피자와 치킨 들어 주셨다.

 국민학교 시절, 운동회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가족이 함께하는 행사였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엄마들의 이어달리기였다. 마지막 주자였던 엄마의 역전으로 우리 반이 우승을 했다. 운동장에 울려 퍼진 함성소리, 담임 선생님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지은 환한 미소, '너희 엄마 달리기 정말 잘하신다'라고 말하던 친구의 말소리, 희미한 기억들 속에 그때 엄마에 대한 내 마음만은 뚜렷하게 기억난다. 엄마가 내 엄마라서 자랑스러웠다.



 아빠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하는 사람이다.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했다. 엄마가 생각하는 남성상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엄마가 존경하며 의지하던 할아버지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다. 다행인 건 아빠는 엄마에게 맞춰주는 것이 가능했다. 겉으로는. 엄마는 아빠를 엄마의 입맛에 맞게 다루어냈고, 아빠도 엄마를 표면적으로는 따랐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꾸역꾸역 사는 아빠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두 분의 사고방식과 삶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가 너무나 큰데 대체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셨을까 하는 생각을 평생 하면서 살았다.



 


 엄마가 집을 나갔다. 내 방은 거실과 맞닿아 있었는데 방 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 휑한 거실을 바라보고 한참을 서 있었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라 금방 깜깜 해질 텐데 엄마가 언제 돌아오시려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엄마와 아빠에게 생긴 문제에서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날 엄마가 나간 텅 빈 집에 어두운 거실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던 내 모습은 지금 설거지를 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른다.



 그 뒤로 비슷한 일이 내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3번쯤 반복되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엄마가 미웠다. 잘못을 한 아빠가 미워야 하는 게 맞는데 나도 내가 왜 엄마를 미워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엄마가 아빠의 잘못을 문제 삼아 이혼이라도 한다고 하면, 나는 이혼가정의 자녀가 되는 것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엄마는 아빠의 잘못을 마땅히 용서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가정을 지키는 길이고 자식에 대한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쯤이었을 거다. 만약 나라면 엄마처럼 자식을 두고 집을 나갔을까. 숨기기는 힘들었을 거다. 자식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서 숨기기엔 엄마가 받은 상처가 더 컸을 테니까. 지금은 그때 엄마의 마음을 어느 정도 어설프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기는 있었어도 우리 가족은 여전히 단란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사랑이었고 엄마의 마음은 넓었으며 아빠에 대한 존경심 또한 우리에겐 남아있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이 계속 행복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안정적인 연애를 하며 행복가도를 달리고 있던 그때, 한 번 더 위기는 찾아왔다. 그 일로 더 이상 아빠를 존경할 수 없게 되었다. 비난과 경멸이 난무하던 집이 힘들었던 나는 도망치듯 결혼을 했다. 또래 중에선 결혼을 일찍 한 편이다. 스물여섯 살이었으니까.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 남자친구는 우리 집의 모든 상황을 다 알았음에도 결혼을 번복하지 않았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결혼과 동시에 지옥 같던 집에서의 탈출에 성공했다.





 엄마는 '너희 때문에' 이혼을 못하겠다고 했다. 엄마가 아빠를 내치고 이혼을 하면 엄마와는 남남이 되지만 혈연인 아빠와 우리는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에, 아빠가 우리에게 짐이 될까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를 버리지 않았다. 엄마는 정말 우리 때문에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홀로 해결해 내셨던 걸까.



 엄마의 말 때문이었을까. 엄마가 아빠와 이혼하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빠에 대한 엄마의 원망이 끓어 칠 때마다 묵묵히 엄마를 받아내었다.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아빠에 대한 험한 말은 자식의 입장에서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엄마가 말하는 그 어리석은 인간이 내 아빠라는 사실이, 너무나 속상했다. 그러다가도 '아빠를 그렇게 만든 건 엄마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할까 봐 걱정되었던 이유는 내가 이혼가정의 자녀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빠를 책임지지 않고 이혼하면 내가 아빠를 감당해야 한다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나 싶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엄마에게 부채감과 죄책감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다. 이 생각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다행히 아빠는 그 뒤로 잘못을 되풀이하지는 않으셨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함께 사는 것 같은 불안함은 우리 가족이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십자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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