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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Aug 19. 2020

엄마와 딸 분리하기

아이의 말에서 시작된 서로 다른 인간으로 마주 서는 법

아이가 요즘 말이 많이 늘었다. 아니, 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며칠 사이에도 아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말을 뱉어낸다.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배운다는게 신기하다. 덕분에 나는 요즘 새삼 ‘언어’라는 것이 가진 능력에 대해 계속 상기하게 된다. 


말을 하게 된 아이는 그 전까지와는 다른 아이가 된다. 같은 아이지만, 내가 그 아이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아이를 ‘독립된’ 개체로 보기 어려웠던 것 같다. 혼자서 할 줄 아는 것도 거의 없고, (모든 것을 타인에게 의지한다.) 울고 떼써서 자신의 기본욕구를 채우는 것이 소통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신체적 발달로 인해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고, (걷기, 밥먹기 등) 다른 사람의 행동을 훌륭하게 모방하는 모습은 볼 때 마다 놀랍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라 여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은 달랐다. 물론, 말도 처음에는 모두가 다 모방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따라하고 따라하고 따라하더니 이제는 드디어 ’자기만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하는 말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밥 주세요” 하고 요구 사항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심지어 “미역국에” 먹고 싶다고 메뉴도 정해준다.) “맛있다.” “무서워요.” “재밋다.”와 같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여전히 다른 사람의 말을 열심히 따라하고 있지만, 그렇게 연습한 말을 조만간 자기만의 말로 뱉어낼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아이가 (땀띠인지 아토피인지) 요즘 들어 팔과 다리가 접히는 안쪽 부분이 붉게 올라왔길래  음식을 주의하려고 감자튀김을 달라는 아이에게 안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가을이 여기 팔 아파서 감자튀김 먹으면 안 돼~” 라고 말하며 아이의 팔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거 아픈거 아닌데?” 나는 순간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당황한 몇 초간의 정적 뒤에, 동생과 나는 아이의 향상된 언어능력에 새삼 놀라며 둘 다 크게 웃어버렸다. (이런 말을 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자튀김을 주지 않았지만 자꾸만 그 말이 맘속에 계속 맴돌았다.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의 말에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말로써 반박을 한 것은 말이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제 정말 실감하게 되었다. 아이가 나와는 독립된 또 하나의 인격체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는 나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나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다른 사람’ 이라는 걸 그 말을 뱉은 아이 덕분에 새삼 깨달았다. 


오늘은 아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나에게 “새미, 다 씻었어?”라고 말했다. 우리 엄마가 나를 “새미야”하고 부르는 것을 몇 번 보더니 요즘 가끔 나를 ‘엄마’가 아닌 ‘새미’라고 부른다. 저번엔 “엄마! 엄마!” 해도 내가 대답을 않자, “새미!”라고 하더라. (근데 진짜 이름을 부르니까 바로 대답하게 되더라.) 처음에는 어이가 없고 웃기다고만 생각했는데, 간혹 아이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게 퍽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엄마가 아닌 내 이름으로 불려진다는 건 아이가 나를 내 고유한 존재로 봐주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 (엄마가 아니라) 너와 내가 동등한 존재로 다시 서게 되는 느낌까지 들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엄마와 딸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서는 것. 내가 너를 가을이라 부르듯이 너도 나를 새미라 부르는 것. 너는 의도 하지 않았겠지만, 그 ‘말’로 인해 너와 나는 다른 모양으로 마주선다. 왠지 더 평등한 모양새 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 나야말로 아이를 한 사람으로써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꾸만 연습해야 한다. 너와 나를 ‘분리’하는 연습을... 나는 엄마라는 이름과 시간이 준 경험으로 인해 너를 자꾸만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내 방법이 맞고 내 생각이 옳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자꾸만 상기시켜야한다. 이건 분명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나는 엄마가 된다면 가장 잘하고 싶은 것이 ‘분리’였다. 아이와 나를 분리 하는 것. 그걸 잘 하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본 많은 엄마들 중 상당수가 그 ‘분리’를 매우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그걸 하지 못하면 그것 때문에 아이도 힘들어 한다. 놀라운 것은 아이가 성인이 되도 그 ‘분리’를 못하는 엄마들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잘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자꾸 생각해야 한다. ‘아이와 나는 서로 분리된 전혀 다른 존재이고 개체이다.’ ‘아이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동안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의 모든 것이 나에게 의존되어있고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먹고 싸고 자는 그 모든 것들을 내가 도와주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아이가 하는 모방이라는 것도 대부분 나의 말과 행동을 모방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아이는 내 생각과 다른 말을 하고, 내가 예상치 못한 말을 한다. 


나는 내심 그게 정말 기뻤다. 아이가 잘 크고 있다는 증거인 것만 같았다. ‘아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아 너도 이제 너만의 생각을 하는구나.’ 하는 기특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기특함 뒤에는 새로운 출발선에 서서 마음을 다시 잡는 내가 보인다. 나는 엄마이지만, 너는 나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 서서 다른 길로 가는 각각의 여행자이다. 


이제부터 아이와의 관계는 이렇게 다시 정립된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다. 

그 소중한 한걸음을 너의 ‘말’들로 시작하게 되었다. 고맙다. 

앞으로의 너의 말들이 더 기대되고 설렌다. 내일 너는 또 나에게 무슨 ‘말’을 하게 될까?

그리고 난 또 어떤 새로운 길에 서서 무슨 다짐을 하게 될까. 무얼 또 배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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