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배우는 사랑
나는 딸 한 명 그리고 아들 한 명의 엄마이다. 사실 나는 첫째가 딸이라, 첫째를 낳고부터는 내심 둘째가 딸이기를 바랐었다. 내가 첫째고,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는데 지금 서로가 함께함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나와 내 여동생은 3살 차이긴 하지만 결혼을 비슷한 시기에 했고, (동생이 결혼하고 6개월 뒤 내가 결혼했다.) 동생이 첫째를 낳고 한 해 뒤 내가 첫째를 낳았다. 심지어 둘째들은 같은 해에 한 달 간격으로 출산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더 서로에게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젠 정말 둘도 없는 친구사이가 되었다. ’ 자매‘가 있음이 늘 감사함인 나는, 자연스럽게 딸 둘을 낳아 나와 같은 자매지간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디 세상사 내 뜻 대로 되던가. ㅋㅋㅋ 더욱이 자녀의 성별이야말로 나의 어떠한 노력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분야가 아니던가. (언젠가 온라인에서 누군가 딸을 가질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과학적인 방법을 구체적으로 올려놓은 게시물을 본 적이 있었는데, 어쨌든 그 방법이 통한다 하더라도 확률을 높이는 것뿐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로 자녀의 성별은 철저한 ‘랜덤‘이다. 결국 나는 둘째로 아들을 얻게 되었다.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일테다. 아들이든 딸이든 나는 존재 그대로의 둘째를 충만히 사랑하지만, (자녀를 두고 만족의 정도를 따지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나는 아니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척도를 들이대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었을 때의 두 아이를 (두 아이의 관계를) 상상해 보았을 때, ‘자매지간이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경험치에 의한 막연한 아쉬움이 있기는 했다. 내가 동생과의 관계에서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을 내 아이들은 못 누릴 수도 있다는 막연한 아쉬움이었다. 대체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가깝게 지내게 되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관계는 자매 사이에 더 높은 빈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와 내 주변에서 경험한 바로는 그랬다. 형제나 남매보다는 자매사이가 관계에서 오는 만족도가 높은 듯 보였다. 물론 이 마저도 내 편견일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성별을 내가 선택할 수 없듯이, 아이들의 미래의 관계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문제다. (사실 뭐, 자매지간이어도 원수처럼 지낼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즉, 나의 그 아쉬움은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요즘 가을이 여름이를 보고 있으면 ‘자매지간’이 ‘남매지간‘보다 더 좋다고 생각했던 내가 우물 안의 개구리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둘이 어찌나 재미나게 노는지, 둘이서 놀이를 시작하면 나는 미뤄두었던 창고정리 까지도 할 수 있는 정도다. 즉, 그만큼 엄마를 찾지 않고 둘이 알콩달콩 잘 논다는 얘기다. 여보 당신 하면서 역할놀이를 하고, 온 집안 배게랑 쿠션을 가져다가 성처럼 쌓아두고 노는가 하면, 미니카 장난감들을 사고파는 가게놀이를 하기도 한다. (사실 둘이 놀 때 나는 주로 집안일을 하기 때문에 둘이 정확히 무슨 놀이를 하는지는 모른다.ㅋ) 이제는 둘이 쿵짝이 맞아서 잘 노는 것을 보니 새삼 둘째가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가 놀이를 이해하고 누나와 함께 주고받는 무언가가 가능하게 된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둘째보다는 첫째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짓궂은 장난을 치는 (장난이라기엔 누나를 아프게 할 때도 많지만;;) 동생을 늘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고, 살뜰히 동생을 챙기는 첫째에게 나는 늘 고맙기 그지없다. 사실 첫째도 7살, 만으로 6살이다. 어쩌면 어리다면 어린 나이인데, 누나라고 동생을 배려하고 챙기는 모습을 볼 때면 엄마인 나도 감동을 받을 때가 많다. 동생 등원 가방을 챙겨주고, 동생에게 책을 읽어주고, 심지어는 이도 닦아준다. (생각보다 구석구석 꼼꼼히 잘 닦아줘서 놀랐다.) 똑같이 나눠준 간식을 먼저 홀랑 먹은 둘째가 누나 꺼를 더 달라고 졸라도 늘 자기 것을 양보하는 첫째. 양보만 얘기하라고 해도 한 바닥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첫째는 둘째에게 양보가 일상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첫째에게 양보하지 말라고 안 해도 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첫째는 둘째의 투정을 받아줄 때가 더 많다. 어제는 첫째가 동생에게 주려고 유치원에서 그림을 그려왔다. 동생이 좋아하는 기차를 그려온 아이. 신발이 잘 신겨지지 않아 낑낑거리는 동생에게 신발을 신겨주고, 잠바가 잘 벗어지지 않아 동동거리는 동생의 잠바를 벗겨주는 첫째. 네 덕에 알았다. ’누나‘라는 단어가 이렇게 따뜻한 말이라는 것을. ’언니‘가 최고라 생각했던 나에게 ’누나‘의 다정함을 알려준 너.
나는 내 아이들을 보면서 진짜 자주 하는 생각이 있는데, ‘여름이 너는 가을이 같은 누나가 있어서 정말 좋겠다~‘하는 마음이다. 둘째에게 농담인 듯 말하지만 진심을 담아 얘기한다. 나중에 엄마 아빠한테는 효도 안 해도 되는데, 누나에게는 효도하라고… 뭐 거창하게 효도까지는 아니어도, 이 시간 너에게 이렇게 따뜻했던 누나가 있었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은 정말 진심이다. 누나에게 받은 사랑이 여름이에게 마음의 큰 자산이 될 것이라는 걸 나는 알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는 철딱서니 없는 막내지만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을 그렇게 어여뻐하고, 자기에게 (어리기 때문에 잘 몰라서) 함부로 해도 잘 참고, 자기가 아끼는 것도 곧 잘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다 누나에게 받은 것들이 여름이 안에 쌓여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누나가 동생인 자신에게 사랑으로 대해줬듯이 자기도 동생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다. (이렇듯 아이들도 받을 사랑을 돌려줄 줄 안다.)
나는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배운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나는 가을이에게 사랑을 배운다. ‘누나’에 담긴 따스함을 배운다. 커가면서 사춘기를 지나면서 서로 서먹한 남매사이가 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지금의 알콩달콩했던 시간을 둘 모두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 다정함이 둘의 마음에 가득 남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맙다 가을여름! 엄마의 마음 안에 이런 다정한 모습을 가득 남겨주어서… 가을이 여름이가 엄마의 딸, 아들이라 엄마는 너무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