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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Jul 08. 2021

아이가 정답이다.

질문하는 아이, 대답하는 어른

집 근처 좋아하는 북카페에서, ‘영어원서읽기모임’이 있었다. 나도 용기내 참여해 보았는데 그 모임에서 ‘어린왕자’를 영어로 읽게되었다. 내가 유창하게 구사할 수 ‘없는’ 언어로 책을 읽게되면 한문장 한문장 차근차근 곱씹을 수 밖에 없는 뜻밖의 ‘좋은점’이 있다. 그렇게 ‘느리게’ 읽다보니 그냥 지나쳤을 문장도 다시 한번 더 읽어보게 되고, 금방 이해가 되지 않으니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학생 때 분명히 읽었던 책인데, 전혀 새롭게 와 닿았던 것은 ‘언어’ 때문이었을까, ‘시간’(나의 나이) 때문이었을까.


이전에는 나를 ‘아이’의 입장에 놓고 읽었다면, 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지금은 좀 더 ‘어른’의 입장에 기대어 읽게 되는 듯 했다. 책 속의 화자인 ‘나’와 ‘어린왕자’의 대화에서 나는 ‘나’(어른)에 좀 더 공감을 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때로는 내 아이와 나 사이의 대화가 떠오르는 순간도 맞이하면서 말이다.


책 속에서 어린왕자(아이)는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때로는 원래 진행중이던 대화에서 벗어나 엉뚱한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그는 그 질문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상대가 만족스런 대답을 할 때까지 그는 묻고 또 묻는다.


내 아이도 그렇다. 아이는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이미 수십번을 물어봐서 답을 알고 있는 것도 질문한다. 엉뚱한 질문도, 때로는 쉽게 대답하지 못할 어려운(?) 질문도 한다. 되도록 성의있게 대답해주려고 늘 애쓰지만,  제대로 대답해주지 못하고 아이가 대신 대답을 할 때도 있다.


책 속 여러 별들에서 어린왕자가 만난 어른들은 주로 ‘답변’을 한다. 그들은 마치 그것이 ‘정답’인냥 이야기 한다. 하지만 누구나 느끼듯 그것은 ‘정답’이 아닐뿐더러 어처구니가 없을 때가 많다. 그 어른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 그래서 그들 평생을 바쳐온 일들은 사실 중요한 것도 아닐 뿐더러 무척 의미 없는 일 같아 보인다. 어린왕자는 다양한 어른들을 만나지만, 결국 어른들은 이상하다는 결론에 이르를 수 밖에 없다. ‘어른’이라 불리는 이들은 마치 그들이 정답인냥군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자신이 아는 것이 유일한것인냥 굴지만 그 모습은 우습고 이상하다. 답을 주는 사람이 권위를 가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들은 인생을 모른다. 답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정답이라는게 있는 것인가. 그게 중요한 것인가. 아마도 아닌 것 같다. 정답은 없다. 정답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얼마나 겸손하게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미미한 존재이고, 평생 질문을 하며 보내도 모자란 시간 만큼을 산다. 우린 정말 세상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세상이라는게 다 알 수 있는 것이긴 한 것일까? 그렇다면 아는게 중요한 것일까. 알려고 하는게 중요한 것일까.


그런 면에서 아이들은 어른보다 ‘제대로’ 인생을 산다. 책 안에서 어린왕자와 선로변경원의 대화는 인상적이다. 어른들은 늘 자신이 있는 곳에 만족하지 못하고 급행열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지만, 선로변경원은 이야기 한다. “그들은 아무도 따라가지 않아. 열차 안에서 잠이나 자고 하품이나 할걸. 어린이들만 창문에 코를 박고 밖을 보겠지.” 어린왕자가 이어서 이야기 한다. “자기가 원하는 걸 알고 있는 건 아이들뿐이에요.”


관찰을 통해서 그리고 질문을 통해서 아이들은 세상을 더 깊이 바라본다. 그러한 세상에 대한 관심을 통해 아이들은 더 풍성한 삶을 산다. 아이들은 창문에 코를 박고 밖을 본다. 열심히 들여다보면 궁금한 것이 생기고 그렇게 또 계속해서 질문을 만들어낸다. 결국 관찰도 질문도 하지 않는 어른이 아이들보다 세상을 풍성하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만족은 못하면서 세상에 질문도 하지 않는(호기심도 가지지 않는) 어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아이를 키우는 어른인 나도 무의식중에는 내가 정답이라 생각할 때가 많다. 아이는 답을 모르고 나는 알고 있으니 내가 답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오히려 내가 아이를 통해 세상을 ‘제대로’ 볼 때가 더 많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가려는 목적지에 상관없이 길가에 쭈구리고 앉아 작은 풀잎, 작은 열매, 작은 벌레에 기울이는 그 관심이 남 눈치 보지 않고, 말도 안되는 질문들 까지도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호기심이 내가 보지 않았을 것들을 보게 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았을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는걸 덕분에 내가 인생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되었다는걸 나는 아이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정답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어른인 나에게 어린왕자는 그 말을 해주고 싶었나보다. 내 아이가 이해가 되지 않아 힘들 때마다 되새겨야겠다. “내가 아니라 아이가 정답이다.” 아이가 틀려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렸기 때문에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자꾸만 반대로 생각해야겠다. 이 무지한 어른들 옆에 아이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아이들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질문하는 어른들이 더 많아진다면 삶은 얼마나 더 풍성해질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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