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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Aug 29. 2021

"너도 니 같은 딸 낳아봐라!"

엄마와 딸, 서로 인내를 가르쳐 주는 사이

"너도 니 같은 딸 낳아봐라!"


부모님에게 이런 유의 말을 안 들어본 자식은 별로 없을 거다. (안 들어봤다면 아마 부모님 혼자 속으로라도 하셨을 거다.) 나도 사춘기 시절(이라기엔 그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었던 것 같은 기간) 동안 내가 엄마를 ‘질리게’ 할 때마다, 엄마에게 심심치 않게 저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간혹 중간에 “꼭”을 붙여 강조하기도 하셨던 그 말... “너도 꼭! 니 같은 딸 낳아봐라!” 그 말이 씨가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엄마의 그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일까. 나는 결혼을 해 딸을 낳았고 그런 내 딸에게서 그 시절의 나를 볼 때가 있다. 


가을이는 (내 딸 이름) 제법 무던한 성격으로 특별히 집착하거나 강력하게 떼를 쓰는 일이 별로 없는데, 딱 한 가지! 옷을 입는 일에 있어서는 아주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입을 옷은 꼭 자기가 골라야 하고 입는 것도 최대한 자기 스스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말이다. 입을 옷을 고른다는 것은 단순히 ‘선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랍에서 옷을 꺼내는 행위 또는 옷걸이에서 옷을 빼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자칫 마음이 급한 엄마가 아이가 고른 옷을 ‘대신’ 꺼내 주기라도 하면 아이는 분노한다. 그럴 땐 빠른 사과와 함께 옷을 다시 제자리에 제 모양대로 놓아두고 아이가 스스로 다시 꺼내게끔 해주어야 한다. 아이의 그 분노는 옷을 입을 때 더욱 강렬하게 폭발한다. 하의의 경우 옷의 앞, 뒤만 구분 해주면 아이는 스스로 입는다. 상의는 혼자 입기 어려워서 목만 끼워주면 팔을 넣고 몸통 부분을 내리는 것은 스스로 한다. (단추는 엄마가 채워준다.) 


그 과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헤매는 아이를 도와주기라도 하면 (팔을 잘 끼워 넣지 못해 구멍을 찾아준다거나 로션을 발라 옷의 몸통 부분이 말려서 내려오지 않을 때 대신 내려준다던지 하는 등)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아이는 무척 분노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바닥에 뒹굴며 소리를 지르고 엄마가 도와줬다는 사실에 분개하며 있는 대로 짜증을 낸다. 이때는 사과도 잘 먹히지 않는다. 아이는 잠시 이성을 잃어버린 듯하다. 온 집을 뛰어다니며 우는 아이에게 뒤늦은 사과를 해보아도 소용이 없다. 결국 한참을 울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은 아이는 다시 내게로 와 입었던 옷을 벗고 처음부터 다시 입겠다고 한다. 그럼 그러마 하고 옷을 벗겨주는 수밖에 없다.


내 입장에서는 참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저렇게 난리란 말인가. 내가 이까짓 일로 이렇게 까지 죄인이 되어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나까지 짜증과 화가 올라오려던 순간, 그런 아이의 모습에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바로 나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자니 그 장면은 생각나지만 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분노하고 짜증을 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애꿎은 엄마에게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며 난리난리 생난리를 부리던 내 모습. 내 딸 덕분에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 있던 그 장면이 다시 소환된다. 아, 엄마가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그나마 나는 4살짜리 딸의 짜증이라 나름 받아줄 만도 하고 웃어 넘겨줄 만도 한데, 내 기억 속의 그때의 나는 아마도 엄마보다 키가 컸던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더 당황스러웠을 터. 아마 이성을 잃어 내뱉는 나의 말에 상처도 여러 번 받았을 터였다. 아, 그때의 엄마의 마음을 이제와 이렇게 공감하게 되고 그때의 내 모습을 이제 와 이렇게 미안해하게 되는구나. 


딸아이가 분노를 쏟아낼 동안 나는 무력하게 거실에 앉아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돌아오고 또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이 뒤엉켜 다시금 그런 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가 저랬구나. 나구나. 싶은 마음이 드니, 왠지 화를 낼 수가 없다. 내가 나에게 화를 낼 수 없는 까닭이고, 그 시간을 견뎌주었던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다. 내가 나 같은 딸을 낳아 그 시절 나의 못난 모습을 다시 마주하는 것. 그리고 그때 보다 조금은 더 큰 그릇이 되어 그 시절의 나를 그 그릇 안에 넣어보는 것이다. 이러라고 엄마는 나에게 너도 니 같은 딸 낳아보라고 했나 보다. 때로는 매 번 하는 그 말이 듣기 싫어, 나 같은 딸 낳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나 같은 딸이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대들었었는데... 내 잘난 모습이 아닌 못난 모습을 쏙 빼닮은 아이를 통해 나는 또 한 번 그때의 엄마가 보여주었던 ‘인내’를 배운다.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인내하기 어렵다. 인내는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고행이다. 인내는 가장 힘든 일이면서 동시에 배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다. 모든 자연, 모든 성장, 모든 평화, 모든 번영,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인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내는 시간과 침묵과 신뢰를 요구한다.” (헤르만 헤세 「밤의 사색」 중)


가장 힘든 일이지만, 배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을 나는 엄마의 말대로 나 같은 딸을 낳아서 배우게 된다. 엄마도 나를 통해 ‘인내’를 배웠을까? 내 모습 안에도 어린 시절의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을까? 할머니의 딸이었던 그녀는 엄마가 되어 ‘인내’를 배웠을 테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딸이었던 나도 엄마가 되어 딸을 낳아 인내를 배운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내를 가르쳐 주는 사이. 서로에게 가장 힘든 일을 주어주는 존재이지만 가장 가치 있는 일을 배우게 하는 존재이다. 그래 딸아, 너도 너 같은 딸 낳아보렴. 배울 것이 많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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