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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개미 May 31. 2021

울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될 필요 없어

슬플 땐 우는 어른이

  

   

    

    

     



출산하고 3박 4일간 병원에 입원했다. 워낙 난산이었던 데다 회복 속도도 빠르지 않아 입원해 있는 동안 아기에게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했다. 아기는 대부분 신생아실 선생님들이 돌봐주었다. 퇴원하던 날, 신생아실의 간호사가 내 품에 아이를 안겨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기가 울지도 않고 정말 착해요.”

순간 나는 조금 의아했다. 아기가 울지 않는다는 게 착한 것인지, 그게 칭찬받을 일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생아라면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우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때 그 아기는 어느새 다섯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잘 울지 않는 편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착한 아이”, “순한 아이”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시부모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고기집에서 아이가 그만 뜨거운 화로통에 발가락을 데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딸이 아픔을 꾹 참는 바람에 우리는 후식으로 냉면까지 다 먹은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작은 발가락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라 군데군데 물집이 잡혀 있었다. 그 밤중에 병원을 찾느라 한바탕 소동이 있었고, 딸은 오른쪽 네 개의 발가락에 4도 화상을 입고 말았다. 그날 이후 나와 가족들은 달라졌다. 그 누구도 딸에게 울지 않아 착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아프거나 슬프면 참지 말고 큰소리로 울으라고, 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아이는 전보다 자주 울지만, 몸의 상처는 줄었다.


슬플 땐 우는 어른이


출근길 지하철에서 엉엉 울었던 그날, 나는 최근에 언제 이렇게 속 시원히 울어봤나 생각해봤다. 슬픈 일, 억울한 일, 화가 나 어쩔 줄 몰랐던 일…, 많은 일이 떠올랐다. 너무 슬프고 화가 나 울고 싶은 순간도 많았던 거 같은데 정작 눈물을 흘린 기억은 없었다. 울면 지는 거라는 생각에 눈물을 참았고, 특히 서른 중반이 넘어서면서부터는 우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삼켜왔던 것이다.


도대체 왜 우리는 울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되려고 할까? 눈물을 흘린다는 건 내 몸이 슬픔을 감지했을 때 일어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일 뿐인데 말이다. 이렇게 겉으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울음을 삼키며 사는 사람들. 언제부터 이렇게 우는 게 어려운 일이 돼버린 걸까? 어쩌면 의사 선생님이 말했던 마음을 편하게 먹는다는 건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적절하게 표출하는 데서 시작되는 건 아닐까?


나는 이제 더는 어른스러운 척하느라 눈물을 삼키지 않기로 했다. 기쁠 때 남 눈치 보지 않고 크게 소리 내어 웃는 것처럼 슬플 때에도 엉엉 우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목 놓아 울고 나서 왠지 모르게 속이 후련해진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마음이 아플 땐 참지 말고 큰소리로 엉엉 울어보자. 아이도 어른도 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글/그림: 김세경(꽃개미)

※ <지하철이 무섭다고 퇴사할 순 없잖아>에 수록된 글/그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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