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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개미 Apr 03. 2022

아주 특별한 식물 DNA

아무래도 엄마를 닮았나 보다



조금 (많이) 부끄러운 과거


뒤늦은 사춘기를 앓았다. 자라면서 부모님 속을 썩인 적 없던 내게 20대와 함께 사춘기가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사춘기는 지독한 것이었다. 즐거움을 주던 일상의 모든 들이 단숨에 부정적으로 바뀌고, 자주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나는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곤 했는데 화풀이의 대상은 주로 엄마였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며 혀를 내두르곤 하셨다.  


식물에 관한 이야기로는 빠질 수 없는, 조금 많이 부끄러운 그 시절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당시 집 앞에 가끔씩 찾아오던 전기구이 통닭 트럭이 있었다. 트럭은 한번 오면 2~3일씩 동네에 머무르다 가곤 했다. 트럭 뒤편 커다란 전기 오븐에는 꼬챙이에 매달린 닭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온 동네에 고소한 냄새를 풍겼, 나는 엄마에게 통닭을 사라고 졸랐다.


온종일 엄마 퇴근을 목이 빠지게 기다린 나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빈손으로 퇴근한 엄마에게 왜 통닭을 사 오지 않았냐고 묻자 엄마는 깜빡했다고 했고, 그다음 날도 여전히 통닭을 사 오지 않았다. 마침내 트럭이 동네를 떠나자 나는 엄마에게 따져 물었고, 엄만 그까짓 통닭 때문에 왜 이러냐며 그 마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버린 나는 그 순간 완전히 속이 뒤틀려 삐뚤어지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이 분노를 표출할 수 있을까 씩씩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엄마가 키우 집안의 화초들이 보였다. 나는 개중에 엄마가 가장 아끼는 화분을 골라 뿌리째 뽑아 버렸다.


그때 내가 분노한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도 명확히 대답하기 어렵다. 추측컨대 항상 바쁜 엄마가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간 서운했던 마음들이 폭발했던 건 아니었을까? 단순히 통닭을 먹지 못해 심술을 부렸다기엔 영영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다행히도 그런 만행을 저지른 직후 스스로도 어떤 한도를 초과했다는 생각이 들어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로도 나는 엄마에게 투정 부렸지만, 더는 작고 연약한 식물을 훼손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아주 특별한 식물 DNA


식물을 애지중지 여기는 나를 보며 엄마는 종종 그때의 일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잊지 못할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나 또한 지금의 내 모습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식물을 훼손하던 사람인 내가 이토록 식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된 건 세월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히 발견한 취향걸까?


주말이면 집안의 창문을 활짝 열어 식물에게 바람을 쐬어주고, 잎사귀 마디마디의 변화를 관찰하며 한주의 안부를 묻는 것. 식물에게 좋은 자리를 찾아서 내어주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쪼그리고 앉아 화분에 새흙을 채워 넣는 내 모습이야 말로 그토록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모습이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놀랄 때마다 어쩌면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어떤 유전자가 있었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 엄마로부터, 엄마는 엄마의 엄마로부터 꽤 오랜 기간 이어져 내려왔을 그 유전자에게 살며시 '식물 유전자'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아마도 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식물과 더불어 살면서 식물을 통해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이토록 삭막하고 바쁜 도심에 살면서 기꺼이 시간을 할애해 식물 집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다름 아닌 식물 유전자의 힘이라면 이해가 된다.


엄마는 큰딸인 내게 준 것이 별로 없다며 매번 미안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이 귀한 유전자 덕분에 무채색의 일상을 생기 있게 가꿔 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엄마와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즐겁다. 길을 가다 매력적인 식물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어 가장 먼저 엄마에게 보낸다. 집에 새로운 식물을 들이기라도 하면 자랑에 여념이 없고, 엄마 집에 갈 때면 화분이 있는 곳을 기웃거리며 눈독을 들인다. 식물을 통해 우리는 확실히 전보다 가까워졌고 식물의 수다를 떨며 더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 또한 위대한 식물 유전자가 가져다 주는 긍정적인 효과다.





글.그림: 꽃개미(김세경)

회사원이며 작가.

8년째 식물을 키웁니다. 잘 죽입니다.

http://instagram.com/sammyk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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