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개미 Apr 19. 2022

식물 선물 요령

방구석 애물단지가 되지 않도록

징글징글 식물 선물


부유하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거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좋아했지만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기엔 감당해야 할 비용이 크다고 생각했다. 달리 할 게 없었던 나는 그저 학교 공부만 충실히 했다. 본격적으로 진로를 선택해야 할 시기가 되자 고민이 생겼다. 일찍부터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탬이 되길 바라셨던 부모님과 달리, 대학교에 가고 싶었. 돈 걱정 없 주변 친구들처럼 한 번쯤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난생처음 부모님 뜻이 아닌 내가 원하는 선택을 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내겐 등록금이라는 현실적인 과제가 주어졌다. 다행히 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국립이라 학비가 저렴했고 운 좋게 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꽤 괜찮은 일자리도 얻었다. 인근에 새로 생긴 고등학교 교무실에서 사무보조원으로 일을 하게 된 나는 야간에 수업을 듣고 낮엔 일을 했다.

사무보조원의 주된 업무는 하루에 한 번 교육청에서 내려오는 공문을 처리하는 일교무실의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를 챙기는 일들이었다. 적은 월급이었지만 학비와 용돈을 충당할 수 있었고 조금씩 저축도 했다. 일도 어렵거나 힘들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식물을 키우는 일만 빼면.


학교 교무실엔 수시로 식물 선물이 들어왔다. 새 학기가 시작이 되는 봄부터 초여름까진 꽃을 피우는 식물이, 한여름부터는 고무나무 같은 실내식물이 주를 이뤘다. 스승의 날이나 행사가 있는 날이면 값비싼 난이 트럭을 타고 실려 들어왔는데, 그런 날이면 입구부터 화분을 일일이 들어 옮기느라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어디 어디에서 화분을 보내셨습니다."라는 짧은 보고가 끝나면, 화분들을 키우는 일은 오로지 사무보조원인 나의 몫이었다.


딱히 돌봐야 할 이유도 애정도 없던 나는 그저 열심히 물만 주었고, 고맙게도 식물들은 한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주었다. 한 번은 교감선생님이 아끼던 난이 죽자 나를 불러 크게 혼을 내셨는데 혼이 나는 내내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면 왜 직접 돌보지 않았는지, 사실은 당신도 귀찮아 방치한 것은 아니었는지 되묻고 싶었다.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억하지 못하는 선물, 누군가에게는 대신 돌보는 책임이 주어지는 식물 선물이야 말로 고리타분한 사람들의 겉치레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가난한 고학생이 갖춰야 할 예의범절에 관해 잘 알았던 나는 그 어떤 불평도 입밖에 꺼내지 않으면서, 꽤 오랫동안 묵묵한 태도로 그 지독한 식물살이를 겪어냈다. 


식물을 선물할 때는 요령이 필요하다


그 시절 식물 때문에 호되게 혼이 난 기억 때문일까. 나는 누군가에게 식물을 선물하는 일에 꽤나 신중한 편이다. 마음 같아서는 한번 키워 보라고 여기저기 권하고 싶지만, 고민 끝에 선물로는 커피 쿠폰을 선택하고야 만다. 식물 집사인 내겐 더없이 반가운 식물이, 막상 식물을 키우지 않는 사람에겐 꽤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무엇보다 내가 선물한 식물이 방 한켠에서 무관심 속에 죽어간다고 생각하면 슬플 것 같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떻게 선물하는 것이 좋을까?


누군가에게 식물을 선물할 때 반드시 고려하는 사항들이 몇 가지 있다. 가장 먼저, 선물 받을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을 잘 알아야 한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사람인 경우 식물은 부모님이 대신 키우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주거 공간이나 사무실과 같은 독립된 환경을 갖추었는지를 확인한다. 하루 중 잠시라도 집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는 사람, 가끔씩 식물에게 물을 주거나 일주일에 한두 번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어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필수다.


다음으로는 잘 죽지 않는 식물을 선택하는 것이다. 내가 활동하는 인터넷 식물 카페에서는 어떤 식물을 가리켜 '국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배우를 '국민 배우'라 부르는 것처럼, 관리가 까다롭지 않아 어떤 환경에서나 무난하게 잘 크는 식물들을 '국민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까다로운 식물들은 물을 한 번만 말려도 쉽게 죽어버리곤 하는데, 선물을 받는 사람이 오랫동안 키우며 보람을 느끼길 바란다면 국민이를 선택해야 한다. 내가 키워본 국민이로는 산세베리아 문샤인, 고무나무, 산호수, 스투키를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모든 선물이 그렇겠지만 식물을 선물할 때 마음을 담는 일은 더더욱 중요한 것 같다. 마음을 담는다는 건 식물을 선물하는 이유와 의미를 함께 전하는 것인데, 흔히 '꽃말'이라 부르는 것을 이용하면 어렵지도 않다. 예를 들어 불행한 일을 겪은 사람에게 '행운, 행복'을 의미하는 행운목을 선물하거나, 화해하고 싶은 이에게는 '관용'을 의미하는 문샤인을 보낸다. 식물과 함께 전해진 마음은 식물이 살아있는 동안 더 큰 마음으로 자라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기껏 선물 한 번에 이렇게나 유난을 떨고 신중해야 한다니.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나서 '아니 이렇게까지 해서 식물을 선물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나는 되뭍고 싶다. 그렇다면 왜 꼭 식물 이어야 하냐고. 선물로는 분명 다른 좋은 것도 많지 않냐고 말이다.

식물은 물건과는 달리 생명을 가진 존재다. 그러니 선물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에게도 이 생명을 돌보고 지켜내야 하는 미션이 따른다. 식물을 주고받는 모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인 셈이다. 그러니 식물을 선물하는 데는 까다로울 만큼의 요령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은 오랫동안 누군가의 식물을 대신 죽여본 내가 얻은 확실한 깨달음이다.





글. 그림: 꽃개미(김세경)

회사원이며 작가.

8년째 식물을 키웁니다. 잘 죽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자의 이름 찾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