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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두 Aug 08. 2020

죽음을 긍정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한 때 나를 가장 약하게 만들었던 것이 현재는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든다.



 한 때 나를 가장 약하게 만들었던 것이 현재는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준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 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 느낌, 단어 등이 자동으로 떠오르는가? 아마 대부분 긍정적인 이미지 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똑같이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라고 할 때, 나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 죽음은 나에게 있어 긍정적인 생각이 절로 맴돌게 한다. 

    

 우리는 살면서 '내일 지구멸망이라면 무얼 하겠는가? 누구랑 있을 것인가?' 또는 '한 달 뒤에 죽는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등과 비슷한 질문들을 누구나 접했을 것이다. 그 때 무엇이 떠올랐던가.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나 하고 싶은 일 등. 갑자기 온갖 생각이 맴돌며 우리는 우리의 마음 저 밑에 있는 욕구에 가장 충실해진다. 이런 질문으로 아주 미숙하게나마 어렴풋이 삶의 유한성을 깨닫기 때문이다.  

   


죽음으로부터 날아온 예고장  

  

 나는 이런 '삶의 유한성'을 매일같이 자각하며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급작스레 소아암 진단을 받고 장기간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았다. 특히, 나는 고위험군에 있었던지라 약물 부작용도 심각해서 매일 같이 심전도 기계를 달고 살았다. 몇 가닥 없는 머리와 퉁퉁 부은 얼굴, 걸을 수도 없는 그저 관상용인 두 다리. 처음에는 내 스스로가 너무 안쓰러워서 마냥 부정하고만 싶었다. 죽음이 언제 나를 데리고 가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하루하루 깊은 절망과 우울에 허덕이며 시간을 낭비했다. 하지만 옆에서 같이 웃고 떠들던 천사 같은 아이들이 진짜 천사가 되어 떠나갔을 때, 그 허탈함은 얼마나 크던지. 슬픔과 상실감, 절망, 허탈함과 같은 감정들이 가슴 속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남겨진 하루하루가 얼마나 의미 있고 소중한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의 복합적인 감정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죽음과 마주 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나에게 생소한 존재가 아닌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다. 죽음이 삶의 유한성을 알려주고,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를 감사의 마음으로 보내면서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상태가 점점 호전되어 치료 종결을 맞이했으며,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여 졸업을 했다. 현재는 ‘나다운 삶’을 살기 위해 이것저것 도전을 하며 즐기고 있다. ‘브런치 작가’ 가 되는 것도 많은 도전 중 하나였다. 나는 이렇게 나를 나답게 해주고, 용기를 준 ‘죽음’에게 감사하다. 그래서 ‘죽음’이 나를 나답게 해주는 세 가지 이유에 대해 글을 쓰려 한다.






1. 죽음은 우리를 솔직하게 해주며 도전할 수 있게 해준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솔직해진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욕구에 가장 충실해지고, 그 욕구를 우리에게로 하여금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죽음이 한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욕구를 실현하지 못하고, 현실에 치우쳐 억누르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우리가 어떤 욕구를 가지며 사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죽음은 우리 내면의 깊은 곳을 바라보게 해주어 욕구를 자각시켜 준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어른이 될수록 도전을 주저하게 된다. 현실 속에 순응하게 되어 용기를 점점 잃어간다. 주변사람들의 시선과 주변 환경 속에서 눈치를 보며 위축되는 자신을 한 번쯤은 마주했을 것이다. 그렇게 ‘진정한 나’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하지만 삶의 유한성을 깨닫는다면 조금이라도 용기가 생긴다. 더 빨리 도전 할 수 있도록 추진력을 주고, 어떤 경우에는 도전으로 인해 미처 몰랐던 잠재력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죽음은 '가장 솔직한 나'를 만나게 해준다.




2. 죽음은 본질적인 삶을 살게 해준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생각해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온 신경을 쏟곤 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현재 상황에 휩싸인다. 현재의 상황이 가장 힘들고 무자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 상황이 전부인줄 알고 그 안에서 고민하며 허덕이다 보면 무엇이 더 중요한지 잊게 된다. 당장의 틀 안에서 스트레스 받아하고, 더 생산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그때 잠시 뿐일 경우도 많았고,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나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고 해서 완전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 나 역시도 불완전하고 현재 상황이 제일 힘들고 가끔 현실에 압도당하기도 한다. 특히 첫 사회에 나갔을 때,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있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라지만 그 갈등이 너무나 나를 지치게 했다. 하지만 그럴 때 죽음의 문턱에 올랐던 시절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결국 죽음 앞에서는 평정심을 찾게 되더라. 이렇게 죽음은 현실에 압도당할 때마다 종종 나를 환기시켜주며,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바라보게 한다. 고로 좀 더 생산적이고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 수 있다.




3.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며 삶을 통찰하고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모든 것은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된다.


 죽음의 문턱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집에서 편하게 낮잠을 자는 것,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 포장마차에서 군것질 하는 것, 웃고 떠들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 나에겐 너무나 당연했기에 나는 이를 ‘소소한 일상’이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이 소소한 일상을 겪을 수 없게 되자, 그때의 소소함은 ‘소중함’이었음을 깨달았다. 결국 같은 시간 속,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소중함’이 ‘소소함’이 되고, ‘소소함’이 ‘소중함’이 된 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마냥 힘든 시간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 그 시간은 정말로 나에게 힘든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시간을 오로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또 집중했다. 하루하루를 온전히 집중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렇게 매일매일 소중한 의미를 하나씩 부여해 가면서 삶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달라지기 시작했다. 삶을 능동적으로 대함으로써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생각했다. 그렇게 내 삶에서 ‘나’라는 주체가 얼마나 중요한 지 몸소 느끼게 되었다. 능동적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야 말로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에는 양면성을 띠듯이 죽음 또한 그렇다. 물론 죽음은 보편적으로 상실감, 허탈함, 슬픔, 공허함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모든 삶은 의미가 있다. 삶은 유한하기에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어찌 보면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동반자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똑바로 직시한다면 그 어떤 것과도 비교 할 수 없는 내 안의 귀중한 자산이 된다. 죽음은 용기를 주고,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나를 나답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죽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은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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