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니 술, 받거니 진심
올 해는 비가 참 많이도 왔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던 찰나에 알고 지내던 형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바쁜가?'
'시간 되면 소주나 한 잔 하지'
쏟아지는 비에 작은 냇가가 생기고 있는 도로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소주'라는 단어에 레몬을 베어 문 것처럼 입에 살짝 침이 고였다.
'좋지요~'
'어디로 갈까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한 살씩 먹을수록 누군가가 불러준다는 게.
누군가가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게.
불러줘서 감사하다고 하자
별 싱거운 말을 다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안산술공방에 들려 선물로 드릴 술 한 병을 아이스팩과 보냉백에 넣고
빗 길을 달려 분당 미금역에 있는 작은 횟집으로 갔다.
이 형님과는 한 살 차이다.
'형'이라고 부르기엔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의 업력이 약해
그냥 '형님'이라고 부른다.
형님은 H자동차를 다니다가 나와서
지금은 용인에서 자동차 부품을 개발하고 만드는 사업체를 5년째 운영한다.
여러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내 이야기도 하고 싶었지만...
내 자아는 이야기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지
형님의 일상 이야기부터 듣고 있었다.
동문 모임에서 골프 치는 이야기,
골프 치고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 새벽까지 술 마신 이야기,
애들 키우는 달달한 이야기로 워밍업을 시작해서
옆에 있는 포차로 옮겨 숯불 향기 가득한 족발 한 접시를 시키고
거세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BGM 삼아
형님이 떨어지는 빗줄기처럼 주르륵 사업하면서 있었던 작은 이야기들을
하나 둘 꺼냈다.
어느 땐가 납품해야 하는 날짜는 다가오는데 일이 빨리 나가지 못해서
심적 부담감이 크던 때가 있었는데
(통상 기업 간 거래에는 납기 지연금이라는 계약 항목이 있다.
정해진 납기일을 넘길 시에는 1일에 약 0.1%~0.5% 정도의 손해배상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잠이 오지 않아 아침 일찍 출근을 했는데
모든 직원들이 작게 음악도 틀어놓고 서로 으쌰 으쌰 하면서
전날 밤을 새워서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형님이 들어오자 '이야 사장님 나오셨다! 우리 금방 끝나요!'라고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더란다.
이 말을 하면서 형님 머리에 그때 생각이 지나가던지 눈가에 살짝 붉어지며
냅킨을 눈 가에 가져간다.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했을까.
납품처에 쫓기고, 직원들은 내 맘 같지 않고, 일 진척은 느리고,
답답한 마음으로 회사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울컥하는 감동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직원들 아침부터 먹이자는 생각으로
회사 사람들과 자주 가던 고깃집이 아직 오픈도 하지 않았는데
사장님한테 전화를 해서 지금 간다고 식사 준비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직원들하고 우르르 몰려가서 출근 시간 조금 지난 아침부터 소주를 마시기
시작해 저녁 12시까지 마셨다고 한다. 힘들어하는 여직원 한 명은 집에 보내고
모두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셔댔다면서
그 상황에서 본인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술 사 주는 것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형님의 얼굴이 취기 탓인지 전등 아래 붉게 보였다.
아마 그때 일은 잘 마무리되고 납품도 잘되고
수금도 잘돼서 회사가 한 단계 더 성장하는 시점이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런데.
작년 3월에 힘든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과정들을 함께 했던 직원 3명이 동시에 나갔다고 한다.
처음엔 너무 힘들고 괴로워했지만
다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인력으로 그 빈자리를 채웠다면서
'이름만 바뀌는 거지 뭐'라고 말하며 소주잔을 털어 넣는다.
이 형님의 성격을 종합하면
여리다.
센 척하지만 여리다.
여리지만 의리가 있다.
아마 평생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던 직원이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 동시에 나간다고 했을 때
한 명씩 불러다 밤새 이야기도 해봤을 테고
그래도 간다고 했을 때는 손 발이 잘리는 두려움도,
본인에게 책임의 손가락을 돌리기도,
인간관계와 회사 조직이라는 두 개의 공통 교집합을
찾아내고자 힘들어했을 거라 짐작한다.
지금은 덤덤하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형님의
얼굴을 보니 살짝 편안함도 느껴진다.
사람 생각은 모두 다르다.
같은 편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명분은 모두 다르다.
자기에게 공감해주고
서로 간에 약간의 신뢰도 형성을 했다고 해서
영원한 내 편은 아니다.
세상이 복잡한 건지
사람이 복잡한 건지
아. 오늘은 뭘 꺼내 마시나.
- 안산술공방 이정욱 작가
- 공방 주소 http://kwine911.modoo.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