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가 없네

대표, 니 말이야

by 이정욱 교수
어이가 없네.


영화 베테랑(2015)에서 유아인이 했던 명대사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일과 관련해서 여러 회사 대표들을 만났다.

이들과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 보면 좋은 기억들은 얼마 없고 씁쓸한 기억들이

먼저 생각난다.


서울 K디지털밸리의 R 메디컬사의 대표, 이 사람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하고 싶었다.


R 메디컬.

의료용 레이저 소각기(암이나 종양을 잘라내는 장치)를 만드는 회사다.

그 분야에서 제법 자리를 잡았는지 넓은 대표 사무실에는 큰 소파가 있었고 책상 옆에는

영화에서 많이 봤던 퍼팅 연습 매트도 있었다.


업체 실사 평가를 하기 위해 방문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더니 어느 틈엔가 자연스럽게

베테랑의 유아인처럼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변에 연구 소장할만한 좋은 사람 있나요?

Y대 박사 연구소장을 앉혀놨는데 이 사람하고 품질팀 팀장하고 사이가 안 좋네.

아니 지들이 사이가 안 좋으면 지들끼리 풀어야지~

연구소장이 와서는 품질팀장 하고 같이 일 못하겠다고 그러고

품질팀장이 와서는 연구 소장하고 같이 일 못하겠다고

둘이 으르렁대면 나보고 어쩌란 말인지'


그러면
나보고 대체 어쩌라는 말인지 원


회사의 모든 권한과 책임은 대표한테 있다.

본인이 조직 관리, 인사 관리를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고 그 둘의 문제로 치부했다.


회사 투어와 실사를 진행한 뒤 인사를 드리면서

'참, 대표님 명함 한 장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아 그래요' 하면서 한 손으로 명함을 쓰윽 건넨다.


...... 뭐지?


그렇다고 굳어진 얼굴로 '뭡니까?'라고 해서 분위기를 싸늘하게 얼어붙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초면인데도 원래 한 손으로 명함 주고 그러나 봐요? 어이가 없네'라고

한 마디 했을 텐데도 말이다.


일본 사람처럼 명함 한 장 주면서도 과도하게 굽신굽신 하라는 게 아니었다.

그 일 이후로 대표, 교수, 회장이든 누구든 간에 상대방이 내게 늘 '상식적인 예의'를

지킬 거라 기대하지는 않기로 했다.


기대하지는 않기로 했다.


식약청에서 의료기기와 관련된 심사나 세미나에 참석할 때 그 회사의 제품이 나오면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실행한다.




두 번째 대표.


한 때 전국적 창업 열풍을 타고 TV에서 벤처 경진대회를 하던 때가 있었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 OO대표가 기억나는 두 번째 대표다.


30대 초반의 젊은 대표, 잘생긴 얼굴과 좋은 말솜씨로 대상을 받고

VC(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까지 받았다.

서울시로부터 강남 역삼동에 창업 공간도 지원받고 대구에 신축 공장도 세울 정도로

돈이 모여들었다. 이 회사의 아이템은 '필터주사기'였다.


주사액이 들어있는 유리 앰플을 톡 하고 부러트리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이크로~나노 단위로

작은 글라스 파티클(유리 파편)이 앰플액 속으로 들어가고 주사기로 들어가서 다시 사람의 혈관으로

들어가는 과정의 위험성을 대비하는 목적으로 주사기 끝에 미세 유리가루를 걸러줄 수 있는 필터를

붙인 주사기가 김 대표가 낸 아이디어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실패였다.

첫 번째 이유는 소모성 주사기에 책정된 보험 단가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두 번째 이유는 필터가 부착된 주사기를 투여자가 사용하기엔 너무 힘이 들고 불편했다.

세 번째 이유는 이제야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의 나이 어린 대표가 사업에 성공한 자산 수십억 대표들이

하는 흉내를 내고 다녔다. 여러 경로로 들린 말로는 그는 고급 안마의자, 스포츠카 그리고 내연녀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다가온 '행운'은 진짜 행운이 아니다.

오히려 본인과 가족, 주변인을 불행에 빠트리는 씨앗이 될 수도 있다.


행운에도 짝퉁이 있다.



세 번째 대표.


인공지능(AI)을 연구한다는 그 회사는 판교에 있었다.

몇 년 전부터 핫-키워드(HOT keyword)가 됐던 인공지능이라는 단어를 붙였을 뿐

기술도, 기술 인력도 없었다. 단 하나 잘하는 것은 '정부과제 응모하기'였다.

매년 공모되는 정부과제를 응모해서 과제비로 인건비를 충당하던 전형적인 좀비 회사였다.

그 대표는 자랑스러운 듯 내게 말했다.


'부사장이 캐나다 사람이에요.

인공지능 하면 캐나다 아닙니까? 하하

이 친구가 또 한국말도 잘해요.

과제 발표 때 이 친구가 나가서 발표하면 뭐 그냥 끝이죠. 하하'


아~ 이런 회사에 내 세금이 들어가는구나.

정말 어이가 없었다.


사전 평가, 사후 감사 시스템이 있다고 해도 현직에서 내가 본 현실에서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정부가 새롭고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라고 지원한 세금으로

중국산 부품이나 모듈을 사서 포장 갈이를 하거나, 인건비로 쓰는 회사들을 잘 솎아냈으면 좋겠다.


아니, 세금으로 지원되는 과제비로 '인건비' 항목을 절대 쓸 수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

물론, 인건비를 쓰지 못한다면 수많은 비정규직 연구자들의 얼마 되지 않는 수입마저 막히는 거라

실행하긴 어렵다는 건 현실이다.


들여다보면 전문가의 세계, 전문직의 세계도 이토록 답답하고 암울한 면이 많은데

그렇지 못한 일반인의 현실은 얼마나 더 답답하고 암울할까.


내가 비관적인가? 아니다. 이게 현실이다.

리얼 팩트다.


크리스마스 때 마시려고 숙성 중인 와인이 너무 맛있게 익어서
주위 분들께 조금씩 나눠드리다 보니 벌써 밑바닥이 보이고 있다.

내 인내심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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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술공방 이정욱 작가

- 공방 주소: http://kwine911.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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