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네 얼과 넋 -
옛 어른들의 풍류이자 멋을 한껏 드러내는 문화가 있으니 바로 호號를 짓고 그로써 서로를 칭하는 것이다. 호를 짓는 문화는 단순히 또 다른 이름의 개념을 넘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나아가 깊은 의의로써 스스로를 다짐하며 나아갈 인생의 방향을 되새기는 역할을 했다.
옛 어른들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음을 예로 여겼는데, 부모님이 지어 주신 것을 귀히 생각했고 때문에 부모나 스승, 임금 외로는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르기를 피했다. 따라서 이름 외의 호칭으로써, 성인식인 관례를 치르고 자(字)라 하는 호칭을 받고 또 적절한 때에 이름대신 부르던 별칭인 호를 지었다.
호에는 아호와 당호, 시호, 묘호 등이 있는데, 아호(雅號)는 ‘퇴계’ 이황 · 한‘석봉’ 등 대개 두 자로써 성의 앞뒤에 붙여 부르는 호칭이다. 당호(堂號)는 거하는 처소의 명칭을 인명대신 부르는 호칭으로 신사임당의 ‘사임당’과 정약용의 ‘여유당’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시호(諡號)와 묘호(廟號)는 어느 인물의 사후에 세운 덕을 칭송하기 위해 국가차원에서 지어 올리거나 내리는 호칭으로, 이순신 장군의 ‘충무’공, 세종대왕의 ‘세종’ 등이 이에 속한다.
아호를 짓는 데에는 보통 거하거나 연이 있는 처소, 즉 산이나 지명 등의 이름에서 따 짓는 경우와 스스로 학문과 인생에 둔 뜻을 담는 것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외로 처한 여건이나 간직한 물건으로 호를 삼기도 한다.
정조대왕은 홍재전서라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남겼는데 이는 역대 조선왕조의 임금 중 유일무이한 업적이다. 이 전서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아호는 홍재(弘齋)였으며, 방대한 저서와 더불어 위업을 남길 수 있었던 근원이 자신의 아호에 담은 뜻에 있다. <논어>에 전하는 증자의 말씀으로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矣 不亦遠乎; 선비가 학문에 둔 뜻이 드넓고도 굳세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 임무가 무겁고도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어짊으로써 스스로의 임무를 삼으니 무겁지 아니한가? 이는 삶을 다한 후에야 끝나는 것이니 멀지 아니한가?”라는 데에서 넓을 ‘弘’자를 취한 것이다. 실지로 정조는 창덕궁에 규장각을 설치하며 또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조선의 학문세계를 드넓혀 나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덧붙여, 그가 즐겨 쓴 별호가 있으니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 그것이다. 천개의 개울에 비치는 하나의 밝은 달에 스스로를 비유하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만대의 사표인 이황 선생의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 등이 있으며, 그 중 퇴계의 뜻은 관직과 명예에서 물러나 시냇가에 거처하며 학문에 정진한다는 겸손과 일생에 강조하신 경(敬)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의미를 담은 시가 아래와 같다.
身退安愚分 몸 물러나 어리석은 분수에 편안하나
學退憂暮境 배움 퇴보할까 늙음이 근심이노라
溪上始定居 시냇가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여
臨流日有省 흐르는 물에 날마다 반성하네
거처하는 명칭으로 호를 지은 어른으론, 이황 선생과 더불어 조선성리학의 터를 닦은 이이가 있다. 이이의 아호는 율곡(栗谷)이며 밤나무골을 뜻하는데, 현 파주시 파평면에 속한 고향의 지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열하일기>로써 이름난 조선 제일의 문장가 박지원 할배께서 쓰신 아호 연암(燕巖)은 제비바위를 뜻한다. 일찍이 문장으로써 명성을 떨치고 소과에선 장원에 들며 영조대왕에게까지 수려한 문장을 예찬 받았으나, 당파분쟁으로 물든 위정자들과 분에 넘치는 출세를 경계하여 과거시험을 통한 입신양명의 뜻을 접었다. 하여 조선의 산하를 유람하며 지냈는데, 도중 개성 부근의 황해도 금천군 연암협의 빼어나고 범상찮은 형세에 반하여 터를 잡아 지내기를 마음먹었다. 바로 그 명칭에서 취하여 호로 삼은 것인데, 고향이 아닌 새로운 거처의 명칭으로 지은 예이다.
다산 정약용은 다방면에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냈고 <경세유포>, <목민심서>, <흠흠심서> 등의 여러 저서로써 그 업적을 남겼다. 그렇게 평생에 이룬 문장과 저서를 모아 편집되고 간행된 것이 여유당전서이며, 바로 이 여유당이 그의 또 다른 호이다. 여유당(與猶堂)의 뜻은 노자의 문장에서 취한 것인데, ‘與兮若冬涉川; 여(與)가 겨울 시내를 건너듯 하고, 猶兮若畏四隣; 유(猶)가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라’라는 뜻으로써, 스스로의 단점을 냉철히 파악하고 그를 경계할 것을 아호로써 삼았다.
추사체로 세간에 이름난 김정희의 호는 수백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하며 자주 쓰인 것은 추사(秋史)와 완당(阮堂)이다. 추사는 젊은 시절부터 써온 아호이며 완당은 청나라서 인연을 맺은 대학자 완원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낸 표상이다. 완당과 흡사한 연원을 가진 호가 보담재(寶覃齋)인데, 완원과 연을 맺을 시기에 만났던 청대의 대학자 옹방강의 아호 담계를 표방하여, ‘담계(覃溪)를 보배롭게 여기는 서재’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선생은 주위의 인사들에게 아호를 붓글로 써 주기도 했는데, 그 중 30여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 있으니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침계>가 그것이다. 침계는 후배이자 제자인 윤정현의 아호로써, 부탁 받은 글자 중 첫째 자를 한나라 비문에서 찾지 못하여 써주지 못하고 있었다. 차후 30년 동안 축적된 고증으로 필의를 방하여 써냈으니 바로 이 작품인 것이다. 글자 하나를 제대로 쓰기 위해 30년의 연구를 거친 것이다. 선생의 성품이 엿보인다.
조국의 독립과 통일에 가장 앞서 힘쓰신 김구 선생의 호는 백범(白凡)이다. 선생께서 호를 백범으로 지은 뜻이 전하는데, 백정(白丁)과 같은 가장 낮은 신분의 이들과 보통의 범부(凡夫)에도 애국심을 고취하야 모든 민중을 아울러 다함께 독립의 길에 나아가고자 자신의 아호를 백범이라 지었다.
더불어 일제의 무분별한 침탈에 맞서 겨레의 정신과 문화를 지켜 문화보국에 힘쓰신 두 어른이 계시니 위창 오세창과 간송 전형필이다. 이 두 분이 이루어 놓은 업적과 유산을 빼놓고는 우리네 예술사를 논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그 위업을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오세창 선생은 삼일운동 민족대표 삼십삼인 중 한 분이시며 우리나라의 옛 그림과 글씨를 집대성하여 <근묵>, <근역서휘>, <근역화휘>, <근역인수> 등을 편찬, 그중에서도 <근역서화징>은 오늘에도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에 근간이 된다.
그러한 안목을 전형필에 오롯이 전하여 간송미술관이 설립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고 오늘날에도 사립미술관 중 제일가는 보고로써 연구와 보전에 힘쓰고 있다. 또한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산골물 澗자와 소나무 松자를, 깊은 산 속 얼지 않고 여여히 흐르는 물과 추운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에 빗대어 그 아호를 지어 주었다 전한다.
끝으로, 이 필자의 아호 삼락(三樂)에 대해 논하자면, 지명에서 차용하고도 뜻을 담는 두 전통을 함께 취했다. 먼저 거처로써 삼은 호의 연원은, 필자가 어릴 적 살던 동네 명칭이 부산 사상구의 ‘삼락동’인 것에서이다. 태백으로부터 이어지는 낙동강의 끝자락에 자리한 동네로, 그 명칭은 낙동강으로 인한 세 가지 이로움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뜻으로써 삼은 호의 연원은 공자와 맹자의 말씀에서 취한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樂’자의 세 의미, 음악 · 좋아함 · 즐거움의 뜻으로써 모두 논하셨는데 ‘시로써 흥하고 예로써 바로 서며 음악으로 완성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論語》태백편)’,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論語》옹야편)’,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그것을 즐기는 자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論語》옹야편)’하는 말씀에서 그 뜻을 취했다.
아울러, 맹자는 직접적으로 三樂이란 어휘를 논했는데,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열거함에 가족 간의 화평함, 하늘 우러러 또 사람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은 것,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라 했다. 이와 같은 의의를 담았으며 또한 우리네 어른 중 아직 삼락이란 호를 쓰신 분이 계시지 아니하여 이를 필자의 아호로 삼아 쓰고 있다.
이와 같이 호에는 그 사람의 인생과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한 호를 서로 부르고 불리며 그 뜻을 되새겼을 것이다. 조국의 산천을 스스로에 투영시키고 위대한 정신을 담았으니, 호는 곧 선비의 자존심이자 자긍심이었다. 그러한 멋과 뜻으로 삶에 나아갔던 어른들이 계시기에 오늘의 우리는 선조들의 후손임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