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여기, 우리네 공간 -
조선을 건국하고 지금의 서울 땅에 수도를 천도하며 가장 먼저 지은 건물, 조선의 역대 임금과 왕후 · 황제와 황후 · 역대 공신과 칠사위를 모신 국가의 큰 사당, 하루바삐 움직이는 현대의 서울에 숨은 듯 자리한 건축, 어제와 오늘을 잇는, 정제된 구조로 큰 울림을 전하는 장엄한 공간은 사적 제125호 종묘이다.
종묘는 우리가 익히 아는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숭례문과 한양도성 등 조선의 어느 건축에 앞서 가장 먼저 지어진 건축물로써 사직과 더불어 국가 그 자체를 상징했다. 또한 뭇 건축가들과 미학자들이 찬탄하는 이 단순, 간결하고도 고요한 공간은 미학과 건축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녀 서양의 파르테논 신전과 비견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 무형유산 · 기록유산으로써 함께 등재된 문화유산은 세계에서 종묘가 유일하다. 그러한 종묘가 육백년의 세월을 넘어 인류에게 전하는 의의는 무엇인가? 어찌하여 오늘날의 우리에게 큰 울림을 전하는가? 종묘에 대하여 삼가 논하고자 한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한 뒤, 태조사년(1395) 경복궁 · 사직단과 함께 가장 먼저 종묘를 건립하였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을 세웠는데, 주례(周禮)의 예에 따라 좌조우사 면조후시(左祖右社面朝後市), 임금이 남녘을 향하고 앉아 바라보는 기준으로 왼편에 종묘 오른편에 사직 앞으로는 조정 뒤로는 시장을 둔다는 예로써 한양을 설계한 것이다. 종묘를 완공한 후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옮겨 종묘에 모셨고, 이후로 조선의 역대 왕조가 여기에 모셔졌다. 세종삼년에는 영녕전을 새로이 건립하고 명종 때엔 정전을 증축하기도 했으나 왜란으로 당시의 종묘는 모두 소실되었다. 소실된 종묘는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세웠고, 이후로 영녕전과 정전은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쳐 정전 19칸, 영녕전 16칸의 규모인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진다.
종묘란,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후 및 추존된 왕과 왕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국가최고의 사당으로써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공간이다. 사당과 더불어 죽은 이를 기리는 공간으로 무덤이 있는데,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백을 모시는 무덤(墓)과 혼을 모시는 사당(廟)을 각각 따로 형성하여 조상을 모신 것이다. 하여 사당에는 죽은 자의 혼이 깃든 신주(神主)를 만들어 모심으로 제례의 정성을 다하였다. 이는 우리나라가 삼국시대부터 이어 온 전통이기도 하다.
또한 종묘와 함께 ‘종묘사직’이라는 명칭으로써 국가를 상징했던 사직이 있는데, 사직은 토지의 신(社;사)과 곡식의 신(稷;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주례의 예에 따라 경복궁의 서쪽에 세워져 종묘와 더불어 조선왕조의 근간이 되었다. 나라에 큰일이 있거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풍년을 비는 기곡제 등의 제사가 사직에서 행해졌다.
종묘는 크게 제를 올리는 공간과 제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뉘며, 그 중심 건물로 정전과 영녕전이 있다. 종묘의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의 기능은 같다. 하지만 엄밀한 유가의 예법으로 ‘불천위’라는 것이 있어, 이 불천위의 여부에 따라 모셔지는 공간을 달리했다. 불천위란 쉽게 말하여 조선을 세운 태조나 당대에도 성군으로 칭송받은 세종대왕같이 그 업적이 위대한 어른의 신주를 영구히 모시며 제사를 올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여 현재 정전 19실의 49위 중 정조대왕 이전의 신주가 불천위에 해당하는 신주이며, 영녕전 16실의 34위는 정전에서 옮겨지거나 추존된 신주이다.
또한 정전 뜰 앞에는 공신당(功臣堂)과 칠사당(七祀堂)이 있는데, 공신당은 퇴계나 율곡과 같이 당대를 이끈 공신의 신위 83위를 모신 곳이며 칠사당은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결합된 형태의 사당이다. 이는 왕실과 조정 나아가 백성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위했음을 뜻하며, 종묘가 단순히 왕실제례만을 위한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미학자 유홍준 교수는 독일의 미술사가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이 그리스의 고대 유적을 이르러 평한 문장으로 종묘의 아름다움을 빗대었다. ‘edle Einfalt und stille Größe; 고귀한 간결 고요한 위대’, 간결하지만 고귀하고 위대하지만 고요하다는 그의 평이 종묘에도 걸맞는 듯하다.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1886~1969)는 „Gott steckt im Detail; 신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디테일이 건축에 있어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러한 디테일이 종묘 곳곳에 숨어있다. 신로와 어로 등 종묘에 나있는 길과 마당인 월대에 다듬지 않은 거친 박석을 놓음으로 제례를 올릴 제관이 체통을 잃지 않도록 하는 무언의 기능을 하게했고, 또한 상월대로 오르는 계단 난간에 새겨진 구름무늬로 이곳이 곧 ‘천상의 공간’임을 나타내기도 했다.
아울러 국내외의 수많은 건축가들이 찬탄을 금치 못하는 곳이 여기 종묘이다. 일찍이 종묘의 미학적 건축학적 가치를 알아본 열도의 어느 건축가가 그리스의 파르테논에 빗대어, 서양에 파르테논이 있다면 동양에는 조선의 종묘가 있다 했다. 건축가 승효상은 우리의 전통적 공간개념인 ‘비움의 미학’을 주창하며,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공간인 월대가 비어 있기에 종묘에서 감동을 느끼고 사색하며 끝없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라 논한다. 서울에 이와 같은 공간이 있는 것은 축복과 같다고 말했다. 구겐하임 미술관과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등 건축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평가받는 프랑크 게리(Frank Gehry, 1929~)는 2012년 방한 당시 오래전 종묘에 들며 받았던 감명을 잊지 못하고 가족들과 함께 재차 방문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실로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말로써 쉬이 형언할 수 없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의 아름다움을 논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그것을 느낄 것이다. · · · 종묘의 단조롭고 정교한 공간이 나란히 이어지는 모습에서 무한의 우주가 느껴진다.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들다. 굳이 꼽는다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있을련가.” 이와 같이 뭇 건축가들과 미학자들에 의하여 예찬된 곳이 이 종묘인 것이다.
종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무형유산이 함께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종묘와 종묘제례 그리고 종묘제례악이 바로 그것이다. 덧붙여 기록유산과 세계유산이 함께 등재되어 있는 해인사의 대장경판과 장격각이 또한 우리네 땅 합천의 가야산에 재한다.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든 예이다. 종묘라는 것은 중국을 비롯하여 베트남과 같은 유교국가에 존재하는 것인데 우리와 같이 그 전통이 함께 전해지는 곳은 없는 것이다. 1995년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2001년에는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함께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이어 2008년부터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써 관리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제례는 조선시대 국가 최대 규모의 제사로써 유학의 예법에 따라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신을 맞고 즐겁게 하며 다시 보내는 절차로 진행된다. 조선시대의 종묘제례는 임금이 친히 행하는 가장 격식 높고 큰 제사로, 제례 날이 잡히면 7일 전부터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였으며 자시(子時; 23시 ~ 1시)에 지내어 당일 가장 먼저 치른다는 정성을 다하고 엄격한 격식을 갖추었다. 정전에서는 각 계절의 첫 달과 음력 12월 중 길한 날을 택하여 일 년에 다섯 번, 영녕전에서는 봄과 가을에 두 번 봉행하였다. 이외로도 나라에 큰 일이 있을 경우 왕실의 어른에게 아뢰는 의식을 종묘에서 먼저 행한 다음 절차를 이어 나갔다. 오늘날에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에 거행된다.
종묘제례악은 음악(樂) · 노래(歌) · 무용(舞)을 함께 갖추어 종묘제례의 의식 순에 맞추어 연행하는 종합예술이다. 악사의 연주에 맞춰 선대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제례의식을 위한 춤을 곁들인다. 종묘제례악은 세종께서 선대들이 살아서는 향악을 죽어서는 아악을 듣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시어 우리의 음악에 걸맞게 손수 작곡하기 시작했고, 세조대에 이르러 제례악에 걸맞게 다듬어지어 보태평(保太平) 열한 곡과 정대업(定大業) 열한 곡으로 완성되었다. 보태평은 선조의 문덕(文德)을 정대업은 무공(武功)을 시어(詩語)로써 칭송하는 것으로 돌아가신 신령과 자손, 왕과 백성을 한데 아우르고 후손에게 한없는 복을 내려 나라가 융성하게 해주실 것을 기원하는 음악이다. 이와 같이 아름답고 장엄한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을 우리나라에선 일찍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여 보전하고 있다.
나아가 종묘에 봉안된, 669점에 달하는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이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써 등재되어 그 의의를 더했다. 어보(御寶)는 금·은·옥에 존호를 새긴 왕실의 의례용 도장이며, 어책(御冊)은 책봉 당시 내려지는 교명과 존호를 올리는 내용의 옥책·죽책 · 책봉의 내용을 새긴 금책이 그것이다. 조선왕조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상징하며 57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봉헌된 유일무이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로써 우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 공간에 세계유산과 무형유산, 기록유산을 함께 보유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처럼 자랑스런 종묘의 뜻을 무엇보다 효孝라고 고찰한다. 효는 조선이 유학적 ·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 덕목이었다. 당시에는 이와 같은 가치를 목숨보다도 중히 여겨, 왜란이나 호란 등의 난중에도 종묘의 신주를 가장 먼저 챙겼다고 하니 당시 종묘에 어떠한 가치를 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현대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 허나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수백 수천 년 동안 그토록 정성을 다하여 온 전통임에 우리는 이에 대해 깊이 숙고해 볼 만하지 않은가, 화두를 던져본다. 효라는 것은 단순히 윗대를 향한 도리만이 아닌 후대로 이어 더부는 영속성의 지혜이자 인간사회를 평화와 안녕으로 이어주는 가장 근원적 요소가 아닐까. 제사는 바로 그 효의 실천으로 드러나는 의식인 것이다. 그러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국가적 차원으로 장엄하게 치르는 곳이 이 종묘인 것이며, 그렇기에 조선은 한양땅에 이 종묘를 가장 먼저 준공하여 완성하고 그토록 엄중히 여긴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 철학적 가치를 토대로 지어진 종묘는 건축학적 · 미학적 아름다움이 더해져 민족의 나아가 인류의 긍지를 드높인다. 우리는 그 가치와 정신을 이어 나가야 마땅하지 아니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