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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의 수의학] 프롤로그

나는 동물들의 불은 지키는 사람이지만, 내 불은 끄는 사람이었다.

by 삼삼한 수의사

나는 똥을 싸고 있었다. 옛날 할머니집의 푸세식 화장실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똥이 시원하게 나오지는 않았다. 똥은 마디마디 끊겨서 나왔다. 그래도 몸속의 배설물을 밀어내고 나왔을 때, 나는 변기 아래에서 작은 불씨를 발견했다. 그 불씨가 혹여 큰 불로 번질 것 같아 나는 나의 침을 뱉어 끄려 했다. 하지만 침의 양도 부족했고 조준도 빗나갔다. 그래서 나는 불을 끄기 위해 물을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밖에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괜찮다.”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그래도 불을 꺼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물바가지를 들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미 집은 불타고 있었다. 검은 연기와 붉은 불길 속에서 나는 허무하게 그 광경을 바라봤다.


나는 소리쳤다.

“119를 불러야 해요!”


나는 소리쳤지만, 할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마치 그 집은, 원래 타야만 했다는 듯이.


나는 꿈을 자주 꾼다. 대부분은 잊지만, 어떤 꿈에서는 내가 꿈속에 있다는 걸 자각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 상황을 조금은 조절할 수도 있다. 이번 꿈 역시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상황은 전혀 통제되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그저 “아, 또 꿈이었구나” 하고 넘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꿈은 잔상이 오래 남았다. 그래서 나는 평소처럼 해몽을 찾아봤다.


꿈은 이렇게 말했다. 불씨는 생명력, 혹은 욕망과 같은 리비도를 상징한다. 푸세식 화장실은 오래된 정체성, 할머니는 내면의 어머니상이다. 불씨를 침으로 끄려 한 것은, 내 안의 생명력(혹은 욕망)을 이성적으로 억누르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괜찮다”는 할머니의 말은, 그 억압을 멈춰도 된다는 내면의 허락이었다. 결국 불로 집이 타버린 것은, 낡은 정체성의 붕괴를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 나는 내 생명력(혹은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걸 놓아줘도 된다는 꿈이었다.


나는 수의사다. 사람의 생명은 다루지 않지만, 동물들의 생명의 불이 꺼지지 않게 지켜주는 일을 한다. 동물들은 작고 약하다. 그래서 그들의 불은 언제나 위태롭다. 나는 몸이 많이 안 좋은 애기의 진료를 볼 때마다 그 불이 꺼질까 조심스럽다. 그렇게 하루에 수십 마리의 작고 여린 생명을 돌보다 보면, 퇴근할 때쯤에는 나 자신의 불이 희미해지는 느낌이 든다. 나의 불을 지키기 위해 퇴근 후에는 러닝화를 신고 달린다. 주 3~4회, 30분 뛰고 30분 걷는다. 체력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로가 밀려온다. 몸이 더 무거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히려 불을 내가 꺼트리는 느낌도 든다. 그런 날, 나는 문득 꿈을 떠올렸다. 동물들의 불을 꺼지지 않게 하느라 정작 나 자신의 불은 돌보지 않았던 건 아닐까.


동물들의 불은 최대한 아끼고 꺼지지 않게 하면서 정작 나 자신의 불은 돌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입원 후 건강해져 퇴원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아무 걱정 없이 널브러져 자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이 너무 태평해서, 처음에는 “어떻게 저렇게 게으를 수 있을까” 싶었지만, 곧 이상하게 부러웠다. 그저 스쳐갈 수 있었던 이 장면이 나를 멈춰 세웠다. 아, 나도 이 아이들에게서 배울 수 있겠구나. 그들의 느림, 게으름, 그리고 온전한 휴식 속에는 생명을 지키는 또 다른 방식이 있었다. 게으름은 단순한 나태가 아니라, 다시 살아날 힘을 비축하는 과정이었다. "게으름의 수의학"은 그 느림 속에서 발견한 생명의 또 다른 리듬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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