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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초 Jul 21. 2022

괜히 건물주가 아니었다

고시원 운영하는 건물주의 '영업 비밀'

일산 소재 방송국에서 취재작가로 일하게 돼, 회사 근방에 고시원 방을 하나 얻었다. 창문이 없는 방은 처음이었다. 주인은 '원래 빈방이 없는데 드물게 난 것'이랬다. 이것도 경험이지 싶어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는데. 이사온 지 3일째 되는 날부터 부동산 어플 '직방'을 문턱이 닳게 드나들고 있었다. 4일째엔 매물로 나온 셰어하우스 방을 하나 둘러보고, 5일째엔 그 방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창문이 없어서 이사하려는 게 아니었다.


3일째 아침. 기지개를 펴며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는데, 눈 앞에 바퀴벌레가 사사삭- 기어가고 있어서였다.




하긴, 바퀴가 없는 게 이상했다. 건물 자체가 그리 깨끗하지 않았다. 누가 공용 부엌에서 고등어를 굽는 아침이면 온 복도에서 비린내가 났다. 지금껏 살아본 고시원 중 가장 열악한 곳이었다. 복도 폭은 어림잡아 50cm에 불과했고, 환기가 잘 안 돼 눅눅한 사람 냄새가 감돌았다. 바닥에 대리석도 깔고 화초도 갖다두고 열심히 꾸몄는데 그래서 더 촌스러웠다. 고시원 입구 유리문엔 쨍한 연두색 시트지가, 벽엔 빨간 꽃무늬 벽지가 붙어 있었다. 요새 유행인 북유럽풍 인테리어완 정반대였다.


고시원 주인은 자기가 가꾸는 공간에 자부심이 넘쳤다. 갈 곳 없는 어린 양을 거두는 자선가처럼 굴었다. 자기가 방을 싸게 내놔서 본인 고시원엔 장기 거주자가 많댔다. 여기 아니면 갈 곳 없는 사람들이라고. 이사를 준비하며 근처의 다른 고시원 시세까지 다 알아본 나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시나?' 생각했다. 그 정도 시설에 그 가격이면 그리 싸지도 않았다. 가격을 깎아달라는 요청을 '이만한 데 없다'는 말로 대충 받아치고선, 그녀가 내 귀에 속닥거렸다.

   

"내가 여기 건물주거든. 그래서 딴 데보다 여기가 싸."


공들여 관리한 곳에 바퀴벌레가 나와 이사가겠다 하니, 그녀는 적잖이 당황했다. 다음 번에 또 나오면 잡아주겠다고 했다. 내 방에 바퀴벌레가 나왔다는 건 이미 건물 전체가 바퀴에 잠식됐단 뜻이라며 거절했다. 새로 이사하는 곳까지는 차로 약 20분. 고시원에서 셰어하우스로 갈 땐 이삿짐이 있으니 택시를 타고, 셰어하우스에서 고시원으로 올 땐 버스를 타기로 했다. 짐을 다 옳기려면 그렇게 서너번은 오가야 했다. 택시비를 아끼려 버스를 섞어 타면 짐 옮기는 데만 몇 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이삿날 아침. 상자를 들고 상자보다 더 무거운 발걸음으로 밖에 나왔는데, 갓 뽑았는지 반질반질한 용달 트럭이 내 앞에 멈춰섰다. 고시원 주인이 몰고 온 거였다.


"타~ 짐 옮겨 줄게. "


그녀는 자선가가 맞았다.  




그녀가 트럭을 모는 동안, 난 조수석 창을 내리고 일산의 봄바람을 맞았다. 택배 상자를 가득 쌓아올린 새파란 용달차가 벚꽃나무 사이를 달렸다. 풍경이 있는 이삿길, 그녀와 나는 평화롭게 잡담을 나눴다. 난 얼마 전에 남자친구에게 차였다 고백했고, 그녀는 자기가 주말마다 사이클 동호회에 나간댔다. 내 팔을 보더니 약해서 거친 세상 어떻게 살아가냐며 운동 좀 하랬다. 셰어하우스에 도착해선 '그런 팔론 못 든다'며 방까지 짐도 옮겨 줬다. 마지막 상자를 내려놓고 방안을 휘 둘러보던 그녀가 물었다. 공용 부엌은 없어? 반지하에 있어요. 방을 나가길래 배웅하러 뒤따라가는데, 그녀가 별안간 반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반지하 부엌의 살림살이를 샅샅이 들쑤셨다. 건조기 뚜껑을 열어보고, 부엌 구석의 분리수거함을 건드려보고, 싱크대 문을 죄다 열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확인했다. 문에 달린 경첩 개수까지 외워 갈 기세였다.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니 난 안절부절 못했다. 그녀가 손 댄 것 중에 새 이웃들의 개인 짐도 있는 것 같아서였다. 반지하 부엌에 딸린 방 안에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는데. 공용 공간에 외지인을 들여서 첫 날부터 이웃에게 찍히는 건 아닐까. 편하게 잘 돼 있네. 요샌 이렇게 (장사) 하는구나. 그녀가 얼음정수기 버튼을 누르자 얼음이 와르르 떨어졌다. 빨리 보고 제발 좀 나가줬으면 했다.


이사를 도와준단 빌미로 경쟁 숙박업체에 잠입하는 게 진짜 목적이었다. 다른 해석도 있다. 우리 엄마는 '네가 바퀴벌레 나왔다고 인터넷에 안 좋은 후기 쓸까봐 입막음 한 거겠지' 라고 했다.


그녀는 과연 돈 벌줄 아는 건물주, 난 남의 친절함에 홀딱 넘어가는 애송이였다.




외줄타기 인류애:

17살부터 26살까지 이사를 10번 했다. 기숙사·고시원·셰어하우스를 전전하다 가족 아닌 남과 10년을 부대꼈다. 남은 진절머리 나고 방구석은 우울하다. 아직도 발 하나 헛디디면 ‘아 진짜 싫다’의 늪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인류애는 외줄타기, 사람과 간신히 더불어 사는 법을 쓴다.


이정표:

    2013년~2015년) 대구외고 기숙사

    2016년)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7년) 학교 후문 H 고시원

    2018년) 학교 후문 L 고시원

    2019년 상반기)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9년 하반기) 학교 후문 B 고시원

    2020년~2021년 4월) 학교 후문 L 고시원

    2021년 4월 둘째 주) 일산 S 고시원 (▶현위치◀)

    2021년 4월 셋째 주~2022년 1월) 일산 변두리 셰어하우스

    2022년 2월~현재) 서울 중랑구 원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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