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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초 Jul 13. 2022

우리 셰어하우스엔 ‘OOO 빌런’이 산다

인류애를 거의 잃었다가 되찾은 이야기

‘나무 조각 타는 냄샌가?’     


어디서 탄 내가 났다. 새벽 다섯 시쯤 된 여름날이었다. 나 사는 셰어하우스 근처엔 공사장이 있었다. 일찍 온 인부들이 남은 건축 자재라도 태우나 했다. 창문을 닫기 전에 모기장 가까이 코를 대봤다. 웬걸, 새벽 공기가 맑았다. 귀를 대 보니 짹짹 우는 새소리만 들렸다. 인부들이라면 두런두런 대화하기 마련인데 이상했다. 처음엔 옅던 냄새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젠 눈까지 매웠다. 더는 방안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건물 안에서 나는 냄샌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 안에 연기가 차 있었다. 전등 빛이 뿌옜다. 공동 현관을 열어 환기하고, 반지하에 있는 공용 주방으로 내려갔다. 잠옷 앞섶으로 코를 막고선 건조기, 세탁기, 냉장고, 가스레인지를 차례로 둘러봤다. 다들 멀쩡했다. 도대체 어디서 냄새가 나는 거지? 전자레인지 문을 열어 유리 접시를 만져봤다. 뜨끈했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지 얼마 안 됐단 거였다. 안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처음엔 짙은 탄 내가, 끝에는 미묘한 단내가 났다. 학교 기숙사에 살던 시절, 공용 휴게실의 전자레인지 앞에서 똑같은 냄새를 맡은 적이 있었다. 며칠 후에 전자레인지 위에 안내문이 나붙었다.     


‘화재 위험 있으니 고구마 조리 금지. CCTV 녹화 중’     


그래도 그땐 휴게실이 연기로 가득하진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태워먹은 걸까. 이 사달을 내고도 환기조차 하지 않은 게 괘씸했다. ‘주인한테 말해야 하나?’ 셰어하우스 주인은 거주자들에게 단체 문자를 자주 보냈다. 민원이 들어왔으니 주의해달란 공지였다. 대부분 ‘공용 건조대에 빨래가 며칠째 방치돼있다’ ‘공용 싱크대에 설거지거리가 계속 쌓여있다’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억울할 때가 많았다. 건조대에 빨래를 오래 널어둔 적은 있었지만, 날이 계속 흐렸던 탓인지 덜 말라서였다. 싱크대에 그릇을 쌓아 둔 적도 없었다. 요리를 안 하는데 식기가 있을 리가.     


‘고구마 빌런(villain, 악당)’은 전자레인지로 고구마 익히기에 재도전할 모양이었다. 공동 현관 앞에 고구마 한 상자가 배달됐다. 당분간 부엌을 주시하다 같은 일이 생기면 그때 말하기로 했다. 공지가 거듭되는 것 자체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난 민원도 넣은 적 없고 잘못도 한 적 없는데 일방적인 주의만 받는 게 싫었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이때다 싶어 고발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너희보단 내가 관대하다는 알량한 아량이랄까.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고구마를 태운 사람 말고, 다른 사람들까지 죄다 빌런으로 보였다. 부엌에서 누굴 마주칠 때마다 ‘저 사람은 무슨 민원을 넣었을까?’ 속으로 아니꼬워했다.     

     

제일 자주 마주치는 게 반지하 방 사람이었다. 그가 공용 부엌을 꼭 개인 공간처럼 써서 그랬다. 부엌 한 편에는 반지하 방에서 나온 쓰레기와 그의 개인 짐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어느 날은 그 쓰레기와 짐이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처음엔 드디어 치웠네 했지만 그 무엇도 다시 쌓이지 않았다. 영영 이사 간 모양이었다. 공교롭게도, 주기적으로 오던 단체 공지 문자가 반지하 방이 빈 후로 끊겼다. 건조대에는 빨래가, 싱크대에는 안 씻은 그릇이 여전했는데도 말이다. 공동 현관 앞에 고구마가 배달되는 일도 없었다.     




난 사실 반지하 방 사람이 싫었다. 마주칠 때마다 혼잣말로 투덜거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정수기로 컵에 물을 받으면서도, 냄비에 라면을 끓이면서도 중얼중얼 볼멘소리를 했다. 혹시 나한테 하는 말인가 싶어 눈치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끔 저녁에 물을 뜨러 가면, 그 사람이 전화기 너머 누군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내 잘못이 있다면 하필 그때 목이 말랐던 것일 뿐인데, 꼭 스파이 짓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간 셰어하우스 주인과 나를 비롯한 모든 거주자를 괴롭힌 건 단 한 명의 짜증이었을 거다. 반지하 방 사람이 이사 가고, 셰어하우스엔 부주의해서 남에게 피해 끼치는 만큼 남의 민폐에도 무던한 사람들만 남았다. 평화가 찾아온 거였다.


‘모두’를 쉽게 미워하면 안 된다. 물을 흐리는 건, 무고한 시민 사이에 낀 ‘한 명의 빌런’이니까.




외줄타기 인류애:

17살부터 26살까지 이사를 10번 했다. 기숙사·고시원·셰어하우스를 전전하다 가족 아닌 남과 10년을 부대꼈다. 남은 진절머리 나고 방구석은 우울하다. 아직도 발 하나 헛디디면 ‘아 진짜 싫다’의 늪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인류애는 외줄타기, 사람과 간신히 더불어 사는 법을 쓴다.


이정표:

    2013년~2015년) 대구외고 기숙사

    2016년)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7년) 학교 후문 H 고시원

    2018년) 학교 후문 L 고시원

    2019년 상반기)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9년 하반기) 학교 후문 B 고시원

    2020년~2021년 4월) 학교 후문 L 고시원

    2021년 4월 둘째 주) 일산 S 고시원

    2021년 4월 셋째 주~2022년 1월) 일산 변두리 셰어하우스 (▶현위치◀)

    2022년 2월~현재) 서울 중랑구 원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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