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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초 Jul 11. 2022

룸메이트 실종사건

작은 것들은 잘 사라져

어릴 때 우리 집엔 백과사전 전집이 있었다. 다양한 동식물의 사진으로 그들의 한살이를 설명해주는 책이었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새끼 바다거북들이 바다로 쏟아져 들어가는 사진도 있었다. 그 아래 있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중 대부분이 성체가 되기 전에 갈매기 같은 천적에게 잡아먹힌다


제3자 입장에서의 덤덤한 서술은 소름 끼치는 데가 있다. 사진 자료를 곁들여 가며 바다거북의 한살이를 알아봤지만, 지금껏 알아본 게 어쨌거나 남 일이라는 것. 그러니 책의 교훈은 '바다거북의 한살이도 아는 아이로 자라나며 네 성장에 힘쓰렴' 정도려나.




책은 거미다뤘다. 유일하게 제대로 읽지 않은 편이었다. 펼치는 장마다 거미 사진이 득시글했다. 징그러워 손대기조차 싫어서 책을 안 열어봤다. 그랬는데, 셰어하우스에 사는 동안 거미가 우리 집에 정착했다. 간만에 대청소하는 날 창문을 닦다 발견했다. 창틀 아래 빗물 구멍에 거미줄이 촘촘했다. 재수가 없어서, 하필 거미를 싫어하는 사람이 사는 데다 제집을 지은 거였다. 내 코 옆에 있는 점만 한 크기의 새끼거미였다.

 

새끼니까.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어릴 때 본 백과사전 속 새끼거북이 생각나기도 했다. 지금 얠 죽여버리면 내가 어쩐지 그 갈매기가 되어버리는 기분이랄까. 때는 여름이었고, 냉방병에 잘 걸리는 나는 온종일 창문을 열어뒀다. 근처에 풀숲이 우거져 날파리가 자주 들어오곤 했는데, 거미집이 빗물 구멍을 막은 후론 덜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새 몇 겹 더 덧댔는지 촘촘해진 거미집 곳곳에 검은 알갱이 같은 게 엉겨 있었다. 거미가 그 사이를 돌아다녔다. 날파리만 먹어 그런지 아직 작았다.


우리 공생은 한동안 지속됐다. 거미는 날 위해 날파리를 잡고, 나는 거미를 위해 창틀 청소를 미뤘다. 그러나 작은 것들은 눈으로 찾아내기 어려운 법. 잃어버려도 그 사실을 한참 뒤에야 깨닫게 된다. 가을로 넘어갈 무렵, 빗물 구멍에 사는 나의 작은 룸메이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방치된지 좀 됐는지 거미줄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새 몸이 커져 새집을 찾아 나선 걸까. 사는 동안 부지런히 집 지어준 거미 덕에 주인이 없어도 거미줄은 한동안 버틸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다음번 살 곳으로 이사하며 셰어하우스를 떠날 때까지는.




사실 찜찜한 구석은 있었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넷플릭스를 보는데, 화면으로 조그만 거미 하나가 기어온 적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앗 거미!’ 하고 휴지를 뜯어내 눌러 죽였다. 거미도 생명이고 생명은 소중하고… 뭐 그런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뜨거운 물에 손 닿았을 때 ‘앗 뜨거!’ 하고 빼는 것만큼이나 반사적이어서였다. 이삿짐을 싸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거미가 빗물 구멍에 살던 내 룸메이트였을까.      


그렇다면 유감이다.      




외줄타기 인류애:

17살부터 26살까지 이사를 10번 했다. 기숙사·고시원·셰어하우스를 전전하다 가족 아닌 남과 10년을 부대꼈다. 남은 진절머리 나고 방구석은 우울하다. 아직도 발 하나 헛디디면 ‘아 진짜 싫다’의 늪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인류애는 외줄타기, 사람과 간신히 더불어 사는 법을 쓴다.


이정표: 

    2013년~2015년) 대구외고 기숙사

    2016년)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7년) 학교 후문 H 고시원 

    2018년) 학교 후문 L 고시원

    2019년 상반기)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9년 하반기) 학교 후문 B 고시원

    2020년~2021년 4월) 학교 후문 L 고시원 

    2021년 4월 둘째 주) 일산 S 고시원

    2021년 4월 셋째 주~2022년 1월) 일산 변두리 셰어하우스 (▶현위치◀)

    2022년 2월~현재) 서울 중랑구 원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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