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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입니다 Jun 07. 2021

아픈 삶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기술, 위빠사나

위빠사나 10일 코스를 해내며



위빠사나 코스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신 분들께 드립니다.

저는 10일 코스를 마치고, 11일째 봉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봉사는 더 많은 분들에게 자유를 드리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위빠사나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분께서 오래전에 수행하신 명상법입니다.


그를 통해 인간의 고통은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이 고통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셨지요.


다른 연구법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몸의 감각, 즉 경험을 통해서만 어려움과 괴로움, 정신적 생각과 느낌 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지적 놀음을 하는 다른 수행들과는 달리 오직 자신의 몸의 감각에서 느껴지는 '알아차림'과 이를 통한 깨달음들로 엮어 만든 수행법이 위빠사나입니다.




어째서 위빠사나 10일 코스에 참여하게 됐나


저는 '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라리의 고백, '나는 불안을 해소하고, 사피엔스를 써내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위빠사나 덕분이다'라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였습니다.

물론 그전에 가까운 지인이 위빠사나를 알게 되어 매니저로 수행했던 경험이 있어 더 동기부여받은 점도 있습니다.


늘 인류사에 큰 획을 그었던 사람들, 대가의 경지에 올랐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명상을 했습니다. 그중 위빠사나는 가장 비 종파적이고, 종교적 이야기가 없으며, 가장 과학적이라는 믿음 아래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본래 고타마 싯다르타 님도 자신으로 종교를 만드는 일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고 합니다.

종교는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만든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전에도 요가와 명상에 관심이 많아 아쉬탕가 요가, 각종 빈야사를 발리에 살며 1년 정도 해왔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이 심리적 괴로움을 치유한다는 점 역시 대학시절부터 십 년 이상 글쓰기 습관을 통해 깨달아온 삶의 기술이기도 했습니다.





이틀 때에는 다리가 벌벌 떨릴 정도로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풀지 못하며 생전 처음으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내 목숨을 차라리 끊어라'라는 느낌과 생각을 느껴보았습니다.

삶에서 정말 처음이었죠. 이런 아픔. 그리고 수행을 위해 이런 아픔을 지그시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 역시도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앉아있음으로 신체적 고통이 오더라도 감각을 알아채면 고통이 줄어든다는 점을 또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를 고통 역시 우리가 특정 신체 부위로 부르는 '아원자입자'로 이루어진 '진동'일뿐이라는 점.

그래서 이 '진동'을 느끼고 알아차리되, 싫어하거나 벗어나려고 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의 원리였습니다.


이 몸에서 떨리거나 아프거나 춥거나 시리거나 마비가 된 듯 아무런 감각이 없거나 찌르는 듯한 고통 역시도 단순한 진동일뿐이라는 점.

여기에 '괴롭다', '힘들다', '슬프다', '우울하다', '차라리 죽고 싶다'라는 부정적인 마음을 연결 짓게 되는 순간, 그 괴로운 감각들이 매우 증폭된다는 점이었죠.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1. 모든 입자는 원자핵과 전자의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어 단순 조화 진동, 다시 말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듯 계속해서 돌고 있다는 점.

2. 이 입자의 전자가 회전할 때 일으키는 운동이 각 입자별 고유의 '진동'을 갖게 만드는데

3. 이 '진동'에 맞춰 같은 '진동'을 일으키면 이 진동은 더더욱 증폭된다.


라는 과학적 사실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이 점이 매우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학적 사실과 마음의 진동이 결국 같은 원리로 운행한다는 사실을 위빠사나를 통해 배울 수 있어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명상을 한다고 앉아있는 동안, 이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먹이'(싫어함, 괴로워함, 분노, 벗어나고픈 갈망 혹은 열망, 우울함 등과 같은 모든 부정적은 감정 반응)를 주는 순간 더없이 커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아 차라리 이런 고통이 수십 분 동안 계속될 바에야 내 목숨이 끊어지는 게 차라리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순사들에게 고문받던 독립군들의 마음의 떠올랐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요.(독립군들의 아픔을 농담처럼 생각한다는 것도 우스운 거지만)


이틀 차에 겪었던 그 지독한 아픔은, 조금씩 명상을 하루 이틀 이어갈수록 줄어들기도, 다시 커져가기도 했습니다. 다시 커질 때는 제가 부정적인 반응을 절대 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점을 제대로 파악 못해, 또 싫어하고 괴로워하며 분노로 반응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통을 어떻게든 잠재우려고 애썼지만, 그 애쓰려는 집착 자체가 분노로 슬픔과 우울로 이어져갔죠.


정말 중요한 사실은


몸의 감각과 우리가 이 감각을 느끼는 주관적 해석 사이가 서로 분리될 수 있다는 점이라는 겁니다.


몸에서 느껴지는 찌르는 듯한 느낌, 뻐근해 무겁고 빡빡한 느낌, 인대 사이 신경이 칼로 조금씩 긁어서 떼어내려는 듯한 찌름과 시린 느낌은 그저 그 느낌일 뿐.

여기에 '아 싫다'라는 '주관적 해석'을 일으키는 순간, 고통이 더 커져버려 잔혹한 상황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Misery라고 고엔카 선생님은 설명하시더군요.

'비참한 상황' 말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 비참한 상황 속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많든 적든, 몸이 건강하든 나쁘든, 제 각기의 집착을 갖고 있습니다.

기분 좋은 것들, 바라는 것들, 설레는 것들과 같이 '좋은 기분과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반대로, 싫어하는 것에서 떨어지려는 것들,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행위들, 불편한 것을 죽도로 싫어하는 성미 등, 삶의 경제적 수준과는 별반으로 사람을 지옥으로 이끕니다.


즐거워하는 일 조차도 우리에게 더 갖고 싶고, 더 열망하며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집착에 빠뜨립니다. 그렇기에 위빠사나 명상에서는 이런 과한 즐거움조차도 집착으로 이어지지 않게끔 '마음을 살펴보라'라고 말해줍니다.

아픔은 이에 반응하여 더 큰 고통과 잔혹한 상황으로 이어지지 않게끔 알아차림으로 그 연결고리를 끊어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좋은 것에서 일어날 수 있는 집착에서도 멀어지며,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아픔에서도 멀어질 수 있어 마음이 늘 평온하며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의 목표이자 이유였던 겁니다.


부처('깨달은 자')가 된 고타마 시타르 타는 왕자로서의 모든 부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깨달아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런 그가 수행했던 방법이 바로 이 위빠사나였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어느 종파로 만들거나, 추앙받길 바라지 않았던 고타마 시타르타. 그는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비의 마음으로 이 수행법을 죽는 순간까지 가르치며 인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부를 주고 싶습니다. 제 스스로도 자유롭고 부로 꽉 찬 삶을 살아가고 싶은 만큼 말이죠.


이 길의 끝에 뭐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흔히 말하는 '해탈'도 영어로는 Liberation, 즉 자유라고 하더군요.

제가 해탈을 바라진 않습니다 사실. 단지 조금 더 깨닫고, 조금 덜 고통스러운 삶에 다가가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채 덜 아프고 덜 힘들게 살아갈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사는 인생에서 함께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이 덜 아프도록, 더 부유하도록 만드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고통을 줄이거나 행복을 더 늘리지도 못합니다.


모든 것은 즐거움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는 점도 느껴지고요. 그렇기에 즐거움이 없으면 우울해하고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파괴하기까지 합니다.

인생은 결국 고통과 고통, 끝없는 고통인데도 말이지요.


이 모든 말들과 모든 것들이 다 믿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 단지 와서 경험해보고 피부와 살, 뼈로 느껴진 것들만을 믿으라며 먼저 수행법을 무료로 배울 수 있게 해주는 위빠사나 수행의 방식도 놀랍습니다.


모든 것을 먼저 베풀고, 그 값을 차마 메길 수 없다며 수강료도 정해놓지 않은 이 명상법.


물론 그 길은 인생의 끝에까지 갈 때까지 끝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죽어서야만 끝이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내가 살아있는 동안, 덜 아프며, 덜 괴로우며 덜 힘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즐거움에 대해서는 어떻다는 겁니까?라고 묻는 질문에는, 적어도 '즐거움에 목메지 않아 덜 괴로울 수 있습니다'라는 말로 대신 대답해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몸의 고통 역시도 마음에 달려있다는 점이 참 신기한 일입니다.

제 주변 사람들도 한 번씩은 와서 꼭 경험해보기를

반드시 권하게 되고 :)


이 한 글에 모든 제 마음을 다 낱낱이 담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이쯤에서 줄여보겠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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