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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그나이트 Aug 25. 2016

[소설] 54. 사랑이 다 그렇지 뭐

Chapter 1. 외로움이 외롭지 않은 나 (1)

“엄마, 이번 달 집 대출금 금방 보낼게요.”


“그래, 잘 했다. 수고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 꼬박꼬박 잘 갚고 우리 애기 이제 진짜 어른이구나. 잘 했어. 엄마가 이건 잘 모아서 너 시집갈 때 큰 거 하나 해줄게. 계속 꼬박꼬박 보내. 알았지?”


“뭔 소리예요. 내가 엄마한테 갚는 거예요. 시집갈 때 주긴 뭘 줘. 엄마 돈인데. 난 내 힘으로 충분하니까 엄마 아빠 이제 좀 즐기면서 사세요.”


“그래그래, 우리 딸 생각하는 것도 아주 바르고, 아무튼 엄마만 믿어. 이번 주 금요일에도 집에 올 거지?”


“금요일에 퇴근해서 갈게요. 저녁 먹고 하루 자고, 예린이가 목욕탕 가지고 해서, 토요일 아침에 다 같이 목욕탕 가요.”


“그래. 반찬 가져간 것들 다 먹었어? 올 때 빈 통 가져와”


“네. 다 먹고 있어요. 통 챙겨 둘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전화를 끊고 생각난 김에 냉장고 문을 열었다. 김치통 1개, 반찬통 3개, 계란과 음료수만 몇 개 있는 작은 냉장고가 휑했다. 나는 반찬통 3개를 꺼냈다. 지난주에 엄마가 주신 반찬 중에 내가 싫어하는 가지 나물이랑 무슨 해조류 무친 것은 잊고 있었다. 뚜껑을 열고 보니, 아직 먹을 만해 보여서 잠시 고민했지만, 눈을 딱 감고 음식물 쓰레기통에 내용물을 쏟았다. 그리고 바로 뜨거운 물로 싹싹 설거지를 하고, 마른행주로 닦아 가방에 담에 현관에 두었다.


현관에 서서 집을 둘러 보였다. 17평 오피스텔은 깔끔했다. 숟가락 하나 개수대에 없었고, 굴러다니는 잡동사니 하나 없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좀 좁았다. 여건이 된다면, 영화를 좀 더 제대로 볼 수 있는 홈씨어터도 구비해 놓고 싶고, 제대로 된 서재도 하나 만들고 싶었다. 영화에 나오는 커다란 책상도 두고 싶었다. 게다가 그릇장도 하나 더 사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혼자 살기에는 25평 아파트는 돼야 진짜 정식으로 혼자 잘 사는 모양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셀프 인테리어 포스팅을 보면, 더더욱 25평 아파트 정도로 이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갑자기 현욱 오빠랑 연애할 때, 코딱지만 한 현욱의 오피스텔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려고 했던 내가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 내가 뭣도 모르는 어린애였던 것이 맞았다. 뭐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주변에는 하나도 없고, 막상 그렇게 살면서, 애도 낳고 했으면 난 엄청 우울했을 것이다. 그때, 결정은 정말 하늘이 도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뿌듯함으로 집을 둘러보던 나는, 시선이 세탁기에 머문 순간 고개를 돌렸다. 빨래 통에 하나 가득 넘치게 빨랫감이 있었다. 독립하고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빨래는 정말 답이 없었다. 작지만 깨끗하고 있어 보이는 집이, 건조대에 빨래를 너는 순간 빈민가처럼 허름해졌다. 베란다가 딱히 없기에 거실에 빨래를 널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거실에 빨래를 널기 싫어서 1주일에 한 번씩 본가에 가서 빨래를 하고 온 거나, 바빠서 못 가면, 엄마가 들려서 빨래를 가져가서 해주시고 있다. 주말마다 빨래랑 다림질을 엄마가 해주시는데, 좀 미안하긴 하지만, 편하고 내가 한 것보다 훨씬 결과가 좋기도 하고, 그 핑계로 본가에 자주 가니까 엄마도 좋아하시는 것이다.


나는 생각난 김에 커다란 가방에 빨래를 넣고, 현관 앞에 두었다. 내일모레 잊지 말고 가져가야지.


세탁기 옆에 빨래가 사라지자 한 결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하나 꺼내 노트북 앞에 앉았다.

오늘은 월급날이다. 처음 독립하고는 월급날이면 늦게까지 동료들과 술을 마시거나 인터넷 동호회 사람들과 번개라도 해서 기분을 내곤 했다. 그러나 독립한 지 1년 이젠 월급날이면 조용히 집 청소를 하고, 가계부를 쓰고 혼자 치킨을 시켜먹는다. 서른이 넘으니, 결혼한 사람들과 놀기도 힘들고, 어린 동생들과 노는 것도 불편했다. 게다가 서른 넘은 노총각, 노처녀들은 더더욱 함께 하면 동급으로 초라해지는 것 같아 더 싫었다.


이래저래 독립을 해서 그런가, 점차 혼자 집에 있는 것에 중독되는 것 같다.


인터넷 뱅킹을 열어, 엄마한테 무이자로 빌린 집값을 갚고, 공과금과 보험료 카드 대금 등을 정리해서 통장 정리를 했다.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부모님께 돈을 빌려, 내 이름으로 구매를 한 내 집이다. 독립할 때 아빠가 월세는 돈을 못 모으니까 절대로 안 된다고 무조건 매매를 하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매매한 것이다. 부모님께 돈을 빌리는 것이 불편했지만, 엄마 아빠가 재테크 어쩌고 하면서 강력하게 요구해서 어쩔 수 없었는데, 사실 지난 1년 동안 집값이 오르는 것을 보니 역시 부모님 말을 듣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게다가 부모님께 매달 갚는 돈은 따로 저금을 하고 계시니, 결국 다 내 돈이기에 그 점도 감사하면서 든든하기도 했고.


통장 정리를 하고 보니, 여윳돈이 780만 원이 모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술도 잘 안 먹고, 데이트도 안 하기에 돈 쓸데가 없어서 저절로 쌓인 돈인데, 악착같이 모은 돈이 아니어서 그런지 공돈처럼 느껴졌다. 적지는 않은 돈이라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스러웠다. 여행을 갈까? 아님 엄마한테 빌린 돈을 더 빨리 갚을까? 아님 돈을 더 모아서 차를 살까? 일단 엄마한테 빌린 돈은 무이자니까 굳이 빨리 갚고 싶지 않았다. 잠시 고민 끝에 천만 원이 될 때까지 좀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노트북을 닫고, 다 마신 커피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이상하게 샤워를 할 때면 집이 조용한 게 싫었다. 좁은 화장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그 순식에 서둘러 브러시로 대충 바닥과 세면대와 변기를 닦았다. 처음엔 화장실 청소를 자주 안 했었다. 미루고 미루다 몇 달에 한 번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한 번 곰팡이가 핀 것을 본 뒤로는 식겁해서 샤워할 때마다 식초와 베이킹소다를 섞은 물로 한 번 쓸어주는 것이다.

샤워를 하고, 얼굴에 마스크팩을 붙이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저녁 11시였다. 이젠 잘 시간이다. 내일 아침엔 영어 학원 갔다가 출근해야 했다. 외국계 회사에 입사한 후로 일주일에 3번씩 아침에는 영어 공부를 한다. 그 후에는 또 내 입맛에 맞는 일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공부하고, 일하고, 운동하고, 퇴근해서 뒹굴뒹굴 쉬는 평온하고 좋은 하루 말이다.


나는 핸드폰을 켜고 오늘의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






“주회계사님 퇴근 안 하세요? 오늘 본가 가신다면서요.”


여자 경리직원이 사방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슬쩍 보니 이미 컴퓨터까지 끄고 퇴근 준비를 다 마친 것 같았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어서 가세요. 저도 하던 거만 하고 갈 거예요. 불금인데 어서 가세요.”


경리 직원이 만만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알기에 나는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사실은 할 일도 많았고, 부장님이 퇴근하기 전에는 일어나기도 뭣해서, 내가 언제 퇴근할지 나도 모르는 실정이었지만.


나의 대답에 부장님이 고개도 들지 않고 ‘김주임 잘 가.’ 하고 건조하게 말했다. 퇴근을 허락받은 경리직원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약간은 부럽기도 하고, 경리니까 일이 적어서 빨리 갈 수 있는 거지 하는 마음에 약간 우월감도 느끼면서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얼마 뒤, 핸드폰이 진동했다. 엄마였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고, 피씨로 카카오톡 창을 켜서 엄마한테 말을 걸었다.

[아직 회사예요]

[그래? 언제 퇴근해? 저녁은?]

[언제 갈지 모르겠어요. 먼저 드세요.]

[알았어. 운전 조심해]


나는 카톡창을 닫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얼마 뒤, 이번엔 부장님께 전화가 왔다. 부장님이 인상을 쓰며 핸드폰을 보더니 전화를 받았다. ‘응, 응, 알았어. 갈게.’ 나는 귀를 펼쳐서 부장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부장님이 큰 소리로 말했다.


“다들 안가? 갑시다. 금요일인데 가족들에게 가야지.”


부장님의 말에 사무실 분위기가 활기차 졌다. 나를 포함한 세명의 직원들은 서둘러 컴퓨터를 끄기 시작했다.


다 같이 책상을 정리하고, 사무실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어휴, 매일 남 좋은 일 하느라, 내 가족은 얼굴을 못 보네. 그래도 오늘은 간만에 9시 전에 퇴근하니 다행이에요.”


“그러게요. 우리 애들은 이제 아저씨라고 하더라구요. 속상해서 마누라한테 애들 교육 잘 시키라고 했다가 부부 싸움했네요.”


“아이고, 그건 김차장이 잘 못했네. 부인이 뭔 잘못이야. 늦게 가는 우리가 잘못이지. 오늘은 그래도 일찍 가니까. 주말에 가족에게 봉사하세요.”


아저씨 직원들의 대화를 듣다 보니, 아빠 생각이 났다. 원래 예린이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살려고 했는데.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과일 통조림을 사 가고 싶어 졌다.


2주 만에 간 집에는 형부만 빼고, 모두 모여 있었다.


“너 온다고 엄마가 조카까지 집합시켰어. 학습지도 빠지고 왔는데, 너무 늦게 오는 거 아니야? 집 나간 딸이 아주 상전이라니까. 좋겠다 너는.”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언니의 말에 엄마가 내 눈치를 보며 서둘러 말했다.


“너도 멀리 이사 가서 뜨문 뜨문 보면, 더 대접받을 테니까, 배 아프면 멀리 가버려. 이건 시집 가서도 하릴없이 붙어서 귀찮게나 하는 주제에 힘들게 일하고 공부하는 동생 보듬을 줄은 모르고 말본새 하고는 쯧쯧쯧. 어서 와. 민영아. 안 덥니?”


엄마가 내 가방을 받으며 말했다.


“하나도 안 덥던데요. 차 에어컨도 끄고 왔어요. 이제 차를 바꿀 때가 됐나 봐. 10년 되니까 너무 골골대서 언제 퍼질까 불안해. 유지비도 너무 많이 들고. 언니 차 안 바꿔? 나한테 버리고 하나 사면 안 돼?”


“기다려봐, 둘째 생기는 즉시 큰 차로 바꿀 거야. 요새 노력 중이야.”


“오올~~ 둘째 정말 낳을 거야? 엄마 허락받았어? 엄마 안 힘들겠어?”


“난 허락 안 했지. 예린이로 족하구만. 둘째 낳으면 날 얼마나 부려 먹으려고 저러는지 원. 둘째 낳으면 내가 니 언니한테 도망갈 거다. 흥!”


“헤헤헤. 엄마는 괜히 그래. 엄마도 애기 보면 예뻐서 어쩔 줄 모를 거면서 헤헤헤.”


“으이구. 언니는 어째 애 엄마 되고 나서 더 애가 되는 거 같아. 암튼 나 차 바꾸게 둘째 생겼으면 좋겠다. 히히히.”


나는 소파에 앉은 예린이에게 뽀뽀하며 말했다. 예린이는 만화에 빠져서 귀찮은 듯 나를 밀쳐냈다.


“흥! 예린이는 이거 안 줘야지.”


나는 괜히 큰 소리로 조카를 보며 아빠한테 쇼핑백을 건넸다.


“이게 뭐냐?”


“아빠 좋아하시는 후르츠 칵테일이에요. 아빠 생각나서 사 왔어요.”


“어이구, 잘 사 왔다. 안 그래도 요즘 엄청 먹고 싶었는데, 니 엄마는 도통 이걸 안 사줘서 내가 삐졌지 뭐냐. 이봐 얼른 수저 가져와. 역시 우리 막내딸 밖에 없다니까.”


“넌 왜 이렇게 돈 아까운 거 사 왔어? 사 오려면 두유 같은 거, 조금이라도 몸에 좋은 거 사 오지. 이거 순 설탕에 몸에 안 좋다고. 차라리 내가 좀 덜 달게 설탕절임 만들면 되는데. 게다가 이게 과일은 싼데 통조림은 비싸단 말이야. 아이고 돈 아까워라. 너는 혼자 살면 돈 아낄 생각을 해야지, 이런 걸로 돈을 버리면 안 돼.”


엄마는 예상대로 잔소리를 줄줄줄 읊어댔다. 아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만 하고 어서 먹을 준비나 해!’ 하고 소리쳤다. 그래도 엄마는 궁시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엄마 아빠의 모습이 나는 슬며시 미소가 나왔다.


엄마가 거실에 상을 펴고, 모두 둘러앉아 여러 과일 통조림 등을 먹었다. 아빠도 연신 오랜만에 잘 먹는다고 해주고, 예린이도 만화보다 더 좋다면서 고개를 박고 먹어주었다. 그렇게 가족 모두가 별 것도 아닌 것을 맛있게 먹어주고, 예린이가 고맙다고 뽀뽀도 해주니 새삼 행복해졌다. 돈을 벌고 있는 것이 정말 좋았다.


그렇게 먹고, 예린이의 재롱도 보며 웃다가, 언니가 졸린 예린이를 업고 자기네 집으로 올라갔다.


조용해진 집에서 나는 씻고 옷 갈아입고 엄마한테 빨랫감을 주었다. 엄마는 세탁기를 예약해두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너는 애벌빨래도 안 하고, 이렇게 툭 던져 놓으면 어쩌자는 거니? 뭐 묻은 거는 이렇게 묵혔다 가져오면 안 돼. 그때그때 묻은 부분만이라도 빨아놔야 돼. 이렇게 좋은 옷을 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니? 어휴 돈 아까워. 그리고 이 반찬통 다 먹고 가져온 거 맞지? 음식 버리면 벌 받아. 특히 밥은 꼭 해 먹어야 한다. 햇반 같은 거는 속이 허해서 안돼. 밥은 밥솥이 다 하니까 꼭 매일 해 먹어 알았지? 혹시 매일 라면 같은 거 먹는 건 아니지?”


“아니야. 밥 먹어. 매일은 안 해도 꼭 밥 어요.”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아빠 옆에서 리모컨을 쓱 훔치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신문을 보는 것 같던 아빠가 갑자기 질문을 했다.


“회사는 어때? 안 힘들어?”


“그냥 그래요. 이젠 일이 익숙해서 별로 안 힘들어요.”


나는 태연한 척하며, TV조선에서 JTBC로 채널을 돌렸다.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진지하게 날 보면서 말을 계속 걸었다.


“민영아, 네가 회계사 된 지 몇 년 됐지?”


“4년? 햇수로 5년일껄요. 생각해보니 나 꽤 오래 했네.”


나는 다시 tvN으로 채널을 돌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음... 너 AICPA 딸 생각 없냐?”


“네?”


나는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 하며 아빠를 보았다. 아빠가 리모컨을 뺏어 텔레비전을 껐다.


“그게 뭔데요? 여보?”


엄마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미국 회계사야. 민영이는 뭔지 알아. 민영아 AICPA 준비를 이제 해보면 어떻겠니? 니 나이에 한국 회계사 하나만 만족해서 그저 그렇게 평범하게 살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자격증 따서 미국의 큰 물에 가는 것도 좋고, 그냥 지금 회사보다 큰 데로 가는 것도 좋고 말이다. 난 니가 더 큰 비전을 봤으면 좋겠거든.”


평소에 아무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좀 당황했다. 미국 회계사에 대해 듣기도 많이 들었고, 사무실에 몰래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화난 목소리로 다다다다 아빠에게 쏟아냈다.


“여보, 당시 왜 딸 앞길을 막으려고 해요? 회계사면 됐지. 뭘 더 하라고 해요? 뭘 또 공부하긴 공부해요? 민영이 이제 시집가야 한다고요. 어차피 결혼하고, 애 낳으면 쓸 데도 없는 자격증을 왜 하라고 하는 거예요? 게다가 공부하면서 더 눈만 높아지고, 남자 못 만나면 어쩌려고 해요. 애 낳으려면 벌써 노산인데 시집부터 보낼 생각을 해야지 뭔 소리예요?

민영아, 아빠 말 신경 쓰지 말아. 담주에 변호사 선 자리 하나 잡아놨어. 이번엔 정말 니 맘에 들을 거야. 넌 일단 결혼부터 해. 독립해서 너무 오래 있어서 그것도 보기 흉해. 여자가 혼자 사는 게 말이 되니? 가뜩이나 다 속상한데 니 아빠는 지금 뭐 이상한 소리 하고 있어 정말.”


“어허! 결혼해서 왜 집구석에 있어. 결혼하더라도 일을 해야지. 물려받을 회사가 있는데 어떻게 쉬어? 민영이가 민주처럼 가정주부 될 그럴 애로 보여? 민영이는 회사 물려받아야 할 아이라고. 아니 안 물려받아도 좋아. 이렇게 똑똑한 애를 왜 아줌마로 만들려고 해? 하고 싶은 거, 자신의 능력을 무한정으로 확 뻗어야지.


그리고 변호사한테 시집가기보다, 차라리 변호사를 만드는 게 더 빠를지도 몰라. 인연이 맘대로 되는줄 알아?


아! 맞다! 그래! 민영아 미국 회계사보다 로스쿨 가서 변호사 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아빠가 그렇게 되고 싶었던 검사가 될 수도 있을 거 아니냐. 만약 그러면 아빠는 평생 소원이 없을 것 같아. 니가 그렇게 해준다면, 평생 아들 없어서 허전했던 마음도 싹 사라지고 말이다.”


“무슨 소리예요. 여자는 어차피 결혼해서 애 낳고 살면 결국 다 거기서 거기예요. 괜히 더 힘들기만 하지. 아무리 내가 애 봐주고 한다고 해도, 결혼 한 순간 정말 힘들어진다고요. 공부한 게 더 억울해져요. 김여사네 딸 의사라고 좋아했는데, 애 낳고 쉬지도 못하고, 고아처럼 할머니가 기르면서 얼마나 눈물 흘리는 데 그래요.

그리고 나이도 있는데, 공부하다가 중간에 남자라도 만나면요? 결혼 준비하고 뭐하면 시험공부하던 거 날아간다고요.

차라리 결혼하고 애 낳고, 임신해서 휴직하면, 그때 회사 쉬면서, 공부만 하는 게 나아요. 내가 애는 다 봐줄 테니까요. 지금 굳이 회사 다니면서, 공부하면서, 선보면서 정신없이 사는 것보다 결혼해서 천천히 해도 된다니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결혼해서 하긴 뭘 해? 결혼은 안 해도 돼. 돈도 많은데 굳이 결혼을 왜 해? 솔직히 우리 회사 여직원들 결혼하고 사는 거 보면 내가 다 속상하다고. 그리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머리가 쑥쑥 돌아갈 때 공부해야 한다고. 모르면 가만히 있어.”


엄마랑 아빠가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두 분 생각 잘 알았어요. 미국 회계사, 로스쿨, 다 알고 있어요. 아빠가 무슨 말하는 지도 알고, 엄마가 무슨 마음인지도 알아요. 그런데 일단 내가 결정해야 하잖아요. 그동안 생각 안 해봤으니까. 좀 생각해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싸우지 마세요.”


“그래 잘 생각해라. 공부 시작하면 회사 그만두고 공부만 할 수 있게 해줄 테니까 걱정 말고. 아빠가 그러라고 돈 버는 거야. 알지?”


엄마는 입을 뻥긋하다 그냥 다무셨다. 아빠랑 싸우기 싫어서 참지만, 동의할 수 없다는 표현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머리가 아파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잘게요. 내일 아침에 목욕탕 가려면 엄마도 주무세요.”


나는 침대에 누웠다. AICPA? 변호사? 로스쿨은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지만, 미국 회계사는 좀 관심이 있긴 했다. 이직이나 승진에 큰 도움이 되는 자격증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승진 같은 것에 목을 매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딱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미국 회계사라...... 타이틀은 멋진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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