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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그나이트 Sep 29. 2016

[소설] 62. 끝이 없는 이야기

Chapter 4. 끝이 없는 이야기 (2)

둘은 택시를 타고, 민영이의 집 앞에서 내렸다.


“안 바래다줘도 되는데.”


“밤이 늦었으니까. 요새 세상이 너무 위험하잖아.”


“그건 그래. 어릴 땐 새벽까지 밖에서 놀고 하는 거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사실 이렇게 늦게까지 안 돌아다니거든. 게다가 혼자 산 뒤로는 더 조심하게 되기도 하고, 집에서 혼자 마시는 게 더 편하기도 해서 보통 9시 전에는 집에 들어오는 편이야.”


“좋은 자세네. 근데 말 들어보면, 혼자 살면서 너 완전 집순이 된 것 같아. 니가 이렇게 집순이일 줄은 몰랐어.”


“하하. 나도 몰랐어. 그래서 혼자 살아봐야 하나 봐. 혼자 살아보니까 내 본성을 알겠더라고. 게을러서 집안을 지저분하게 만들지도 않아 청소하기 싫으니까. 아예 안 건드리거든. 크크크.”


“진짜? 대박이다. 하하하.”


“이제 들어갈게. 오빠도 잘 가. 오늘 잘 먹었어. 다음엔 내가 살게.”


“그래. 다음엔 좀 일찍 만나자. 체력을 생각해서. 하하하.”


“그래. 안녕.”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고, 민영이는 집으로 올라갔다. 현욱이는 1층 로비에서 잠시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건물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열자 센서등이 환하게 켜졌다. 신발을 벗고, 현관 선반에 가방을 올려놓고, 거실 불을 켜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소파에 앉았다.


급 피곤이 몰려왔다.


보통 외출을 하거나, 수다를 떨고 나면 많이 피곤했다.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했나. 무슨 실수는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단순한 수다 만남은 거의 가지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피곤하긴 했지만, 후회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생각이 많지 않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가끔 이렇게 만나서 편한 만남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았다.


민영이는 물을 쭉 마시고, 몸을 일으켰다. 집안을 둘러보았다. 옷과 신발이 제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민영이는 기계적으로 옷을 장롱에 집어넣고, 신발은 신발장에 넣고, 가방도 제자리에 걸어두면서 집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샤워를 할 마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때, 전화가 왔다. 화장실에서 나와 소파 위에 놓은 핸드폰을 봤다.


현욱 오빠였다.


민영이는 소파에 기대앉아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살짝 피곤했지만 아직까지 즐거운 여운이 남아 있어서 피식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오빠. 벌써 도착했어?”


민영이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으응, 넌 뭐해?”


“난 씻고 자려고. 오빠도 이제 자야지.”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있지. 너 지금 아무도 안 사귀는 거 맞지?”


“응?...... 그렇지. 뭐야 왜 그래 갑자기.”


“민영아. 있지. 나 이러려고 너를 만나러 간 건 아닌데. 근데 말이야.”


“뭐야. 왜 그래.”


민영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쁜아. 나 아직 너 못 잊었나 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널 잊은 적이 없나 봐. 우리 다시 시작하자.”


“무슨 소리야. 나 못 들은 걸로 할게. 끊어.”


“잠깐만! 그러지 마. 너도 오늘 나 만나서 좋았잖아.”


“그래, 즐거웠어. 좋았고. 하지만 다시 시작하는 그런 거는 아니야.”


“그래, 갑자기 이래서 당황스러운 거 알아. 미안해. 하지만, 잘 생각해봐. 오늘처럼 우리가 편안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한 거 정말 오랜만이지 않아? 다시 만나서 좋았잖아.”


“그래. 좋았어. 편안하고 좋았어. 하지만 아니야. 우리는 그때 끝났잖아.”


“예쁜아. 오랫동안 불러보고 싶었어, 예쁜아. 난 너밖에 없어. 그동안 다른 사람도 못 만났고, 너만 생각했어. 난 다시는 너 같은 사람 못 만나. 너도 나 사랑했잖아. 지금도 나 싫지 않잖아.”


“그땐 그랬지. 그땐 좋았어. 오빠도 나도 서로 같은 사람 만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다시 시작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일단 내가 많이 변했어.”


“아니야. 넌 그대로야. 여전히 예쁘고, 여전히 순수해. 내가 변할게. 내가 더 많이 사랑해주고, 배려해주고, 대화할게.

그동안 많이 생각했어.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너한테 잘 해주고 싶다고. 그러니까 한 번만 기회를 줘.”


“오빠 그만 해. 다시 시작해도 똑같을 거야. 우리가 그때 헤어진 건 내 잘못... 아니 됐고, 누구 잘못이던 상관없어. 그냥 어쩔 수 없던 거야. 그냥 거기까지였던 거야. 중요한 건 시간이 많이 지났어. 오빠 다시 만나서 좋았고, 오빠랑 대화하는 것도 여전히 즐거워. 정말 좋아. 그런데 이미 끝난 인연이야. 우리가 다시 남자 여자로 만날 일은 없을 거야.”


“너는 나 잊을 수 있어? 나는 못 잊어. 너는, 우리는, 특별하잖아.”


“잊지 쉽지 않겠지. 평생 생각하겠지. 누가 첫사랑을 잊냐. 그렇지만 다 추억일 뿐이야.”


“그러지 말고, 추억으로 끝내지 말자. 우리 그때처럼...... 아니, 이제 진짜로 사랑하자. 내가 진짜 잘 할게, 내가 진짜 행복하게 해줄게.

그동안은 잠깐 서로 방황했다고 생각하자.”


“오빠, 나 방황하지 않았어. 난 내 길을 걸어왔어. 오빠 생각 하긴 했지만,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리워 한 건 아니야.

다시는 이런 사랑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우린 이제 아닌 것 같아. 우리는 친구로는 좋아도, 연인으로는 아닌 것 같아. 다시 사귄다 해도 똑같은 결과일 거야. 그러니까 그만하자.”


“왜? 왜 그렇게 생각해. 난 아직도 널 사랑해. 너도 외면하지 마. 나에 대한 감정이 있을 거야. 이제 다시는 헤어질 일 없을 거야. 난 그동안 널 잊은 적이 없어.”


“오빠. 이러지 마. 난 아무 감정 없어.

에휴~~~. 오빠 그만하자. 다시 만나서 좋았는데. 아니네. 내가 이럴까 봐 연락 안 했던 거야. 우리 친구도 힘들겠다. 암튼 그만 자. 전화 끊을래.”


“...... 정말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 싫어?”


“응, 난 다시 오빠랑 만난다는 건 생각해본 적 없어. 단지 내가 상처 줬다는 생각에 사과하고 싶었고, 오랜 친구로서 옛이야기 나누고 싶었지. 다시 만나고 그런 거는 정말 싫어.”


민영이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눈물이 한 방울 흐르면 로맨틱하겠지만, 눈물보다는 짜증이 났다.


“난...... 나는 민영아. 정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전화할 수 있었거든. 친구가 그리울 정도로 여유도 생겼고, 그런데 생각나는 친구가 너뿐이고 그래서 당당하게 전화한 거거든. 그런데 다시 만나니까. 난 처음 만난 그때처럼 또다시 너에게 반해버렸어.


넌 너무 예뻐.


나에게는 정말 너 밖에는 안 보여......”


“에효......

오빠 일단 자요. 피곤하고, 술도 마시고, 내일 학원도 오픈하고, 안 하던 여행도 다녀오면서 좀 감정적 이 된 것 같아. 그러니까 일단 자. 자고 나서 다시 봐.”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나 술은 안 마셨어. 처음 작은 잔 하나 외에는 다 네가 마셨지. 난 콜라 마셨다. 그러니까 술김에 실수라고 보지 마.”


“알았어. 내가 술 마셔서 어지러워. 그러니까 나 잘래. 그만 자자.”


“낮에 다시 전화할게.”


“그래그래.”


“전화 피하지 마.”


“알았어.”


“진짜로!!! 오늘은 내가 실수라고 칠 테니까. 전화 피하지 마. 내일부터는 부담스럽게 안 할게.”


“뭐야. 정말. 오빠 왜 이렇게 구질구질해졌어. 오빠 나 진짜 피곤해. 일단 자자. 진짜 끊는다.”


“야! 예쁜아! 전화받을 꺼지?”


“...... 흠...... 알았어. 받을 께. 얼른 자.”


“알았어. 잘 자. 전화할게.”


“허허. 잘 자. 끊는다.”


“안녕.”


민영이는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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