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사랑은 순식간에 이별은 천천히 (1)
“으으으.”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민영이가 신음 소리를 냈다. 뒤따라 지은이도 탕에 들어왔다.
“목욕탕 온 거 정말 오랜만이지?”
“그러게 거의 일 년 만에 왔나 봐.”
“어때, 시험 끝난 기분이?”
“모르겠어. 매일 공부하다가 딱 손을 놓으니까 기분이 정말 이상해. 쉬는 건 좋은데, 떨어질 지도 모르니까 마냥 손 놓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당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근데 사실 다 귀찮고 그냥 잠만 푹 자고 싶거든.”
“그래. 좀 쉬고 생각해. 떨어지던 붙던 일단 아무 생각 말고 좀 쉬어.”
“아이고~~. 노골 노골 해지면서 정말 좋다.”
민영이가 눈을 감으며 말을 끊었다. 시험 이야기 자체가 지금은 하기 싫었던 것이다. 지은은 민영을 바라보았다. 지은이는 민영이가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랐지만, 사실 민영이가 시험공부하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집안 좋고, 외모 좋고, 학벌도 딸리지 않는 민영이었다. 그 어려운 시험에 붙어봤자, 몇 년 활용도 못하고 결혼해서 애기 낳으면 어차피 집에서 살림할게 뻔했으니까 말이다. 친정에서 다 지원해줄 텐데 딴 사람 손에 애 맡기면서 아등바등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굳이 어려운 시험을 준비한답시고 한창 화창한 나이에 어두운 골방에 박혀 젊음을 썩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야 외동에 가난한 집이라 부모님 모시려면 약사 자격증이라도 따야 하지만, 잰 왜 저렇게 공부하느라 고생할까. 내가 민영이처럼 부잣집에 태어났다면 훨씬 더 즐겁게 살 텐데......’
지은이는 거칠어진 민영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리고 분위기 전환을 위해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나 창수 오빠랑 여행 간다. 제주도 가려고, 너희 커플도 시간 되면 같이 갈래?”
지은의 말에 민영은 눈을 감은 채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은이는 민영이 얼굴을 못 보고 계속 말했다.
“합격 발표 나기 전인 지금 아니면 언제 가겠어. 합격하면 합격한 대로 바쁠 거고, 떨어지면 떨어진 대로 바쁠 테니까. 시간 있을 때, 지금, 커플 여행 한 번 가자. 어때? 우리도 매번 둘만 놀러 가니까 이젠 좀 심심해. 다른 커플이랑 가고 싶어.”
“너네는 부모님이 여행도 다 허락하니?”
민영이가 눈을 뜨고 진심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봤다.
“그럼, 오빠가 양가 부모님께 교제를 다 허락받았잖아. 어차피 결혼도 할 거고. 엄마가 걱정하는 눈치긴 한데 대놓고 말은 안 하셔. 그리고 솔직히 요즘 세상에 커플 여행이 뭐 별거라고 허락을 받고 자시고 하냐? 돈 줄 것도 아닌데.”
“그럼 결혼을 빨리 해. 아무리 요즘 세상이 그렇다고 해도. 니 부모님은 엄청 속이 타들어 가실걸.”
“에이...... 그래도 졸업은 해야지. 창수 오빠도 한 학기 남았고. 오빠 졸업하고, 나 약시 패스하고, 1~2년 돈 좀 더 모아서 결혼하기로 했어.”
“좋겠네.”
지은이가 호호 웃었다.
“그럼 좋지. 호호.”
“그렇게 창수 오빠가 좋아?”
“그럼 좋지. 무엇보다 어떤 남자를 만나야 하나 하는 조급함? 기다림? 암튼 뭐 그런 것도 없고, 오빠랑 결혼하면 오빠는 사진 스튜디오 하고, 나는 약국 하고 그럼 되니까. 계획도 세울 수 있고. 이런 안정감이 난 참 좋아.”
“...... 좋겠다......”
민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순간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심플하게 해결되는 지은이가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은 똑같은데 왜 나만 복잡하고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한숨이 나왔다.
“에~이 왜 그래. 너도 현욱 오빠 있으면서.”
민영은 가난한 집안에 취업도 결정되지 않은 현욱을 생각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내가 시험에 붙어야 진짜 좋을 게 있지.’라고 속으로 말할 뿐이었다.
“아무튼 여행 갈 거야 말 거야?”
“지금은 아닌 거 같아. 가더라도 오빠랑 둘이 가야지. 우린 단 둘이 여행 간 적도 없으니까. 그때 엄마한테 너랑 여행 간다고 할 테니 입이나 잘 맞춰줘. 다 같이 가는 건 다음에 하자.”
목욕탕을 나와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민영은 로션과 선크림을 바르고, 비비크림을 꺼냈다. 그런데 매끈해진 피부에 발그레한 볼과 입술이 예뻤다. 민영은 거울을 한 참 보았다. 그리고 비비크림을 뚜껑을 닫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화장 안 해?”
“응, 오늘은 하기 싫다. 그냥 지금이 너무 좋아.”
“그래? 나도 그럼 생얼로 돌아다닐까?”
지은도 민영을 따라 거울을 보았다. 그러나 곧 비비 크림을 꺼냈다.
“안 되겠어. 오늘 창수 오빠 부모님을 만날 지도 모르고...... 나는 그냥 기본만 해야겠어.”
지은은 비비크림을 바르고 컨실러로 잡티도 가리고, 크림 볼터치에 마스카라를 칠하면서 자꾸 기본만 하는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하면서 단장을 했다.
민영은 머리를 말리며 거울을 보고 씩 웃었다. 시험이 끝나고, 간만에 목욕도 해서 그런지 볼수록 예뻐 보이고 기분이 좋았다.
핸드폰을 보니 약속 시간이 지나있었다.
“지은아 서두르자. 시간이 많이 흘렀다.”
“뭐 급해? 오빠 보고 기다리라고 해. 군대도 기다린 여자친구, 한두 시간도 못 기다리냐?”
“아. 그건 그렇네. 히히 그럼 기다리라고 해야지.”
민영은 현욱에게 전화했다.
“오빠.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네. 조금만 더 기다려요.”
“...... 알았어.”
“헤헷, 내가 시원한 커피 살게. 기다려요.”
현욱이는 좀 불편한 목소리였지만 민영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오늘은 현욱 오빠랑 뭐할 거야?”
지은이가 물어봤다.
“글쎄. 마음 같아서는 어디 들어가서 한숨 자고 싶기만 해.”
“오빠한테 그렇게 말해. 어디 들어가서 자고 싶다고. 엄청 좋아하는 거 아냐? 호호호.”
“에이. 그런 뜻 아닌 거 알면서 그런다. 그리고 울 오빠 그런 사람 아니야.”
“그래? 창수 오빠는 내가 그렇게 말하면 엄청 좋아하던데. 남자들은 다 똑같지 현욱 오빠라고 다를 거 같아?”
“아니야. 우리 오빠는 달라. 얼마나 로맨틱한데. 그리고 몇 달 전에 제대하고도 데이트 못했었잖아. 그래서 오빠가 준비를 많이 했을 거야.”
단장을 끝내고 밖에 나오자, 목욕탕 입구에 창수가 차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민영아 타. 태워줄게.”
지은이가 말했다.
“아냐. 현욱 오빠가 바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어.”
“민영아.”
그때 현욱이 민영이를 부르면서 나타났다. 현욱이는 목욕탕 건물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있었어? 전화하지 인마.”
“그러게 너도 데리러 올 줄 몰랐다.”
“현욱 오빠, 타세요. 같이 나가요.”
두 남자의 인사가 끝나자 지은이가 호기롭게 말했다.
“아니야. 우린 가까운 데 가니까.”
“그래? 그럼 탈까?”
민영이는 거절을, 현욱이는 승낙을 동시에 말했다. 민영이와 현욱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지은이가 웃으며 뒷문을 열고 민영이를 끌었다.
“타. 우리 별로 스케줄도 없어. 태워줄게.”
민영, 현욱, 지은과 창수를 태운 차가 출발했다.
“어디로 가? 특별한 거 없으면 밥 같이 먹을래?”
창수의 말에 현욱이 냉큼 대답했다.
“좋지. 뭐 먹을까?”
“목욕하고 나니까 뜨듯한 국물 먹고 싶어요. 해장국 먹으러 가요.”
지은의 말에 해장국을 먹기로 했다. 창수는 핸드폰으로 해장국 집을 검색해서 차를 몰았다.
“차 있으니 좋네요. 이렇게 편하게 다니고, 지은이는 좋겠다.”
민영이가 창수에게 인사치레를 했다.
“민영이는 이번에 회계사 붙으면 바로 한 대 뽑을 거 아냐? 나처럼 국산차 말고 외제차 뽑을 거면서 뭘.”
창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엄마가 시험 붙으면 하나 뽑아 주신다고는 했는데, 붙어야지요.”
민영이가 대답했다.
“에이, 이번엔 붙겠지. 걱정하지 마. 민영이는 어떤 차가 좋아? 아니다. 이건 현욱이에게 물어봐야 하나? 보통 차는 남편이 결정하니까. 현욱아 민영이가 무슨 차를 사면 좋겠냐?”
“나? 난 차를 몰라서.......”
현욱이 더듬거리자 민영이가 현욱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합격하고 생각해야죠. 시험 발표도 안 났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기 싫어요.”
별생각 없이 큰길까지만 얻어 타려고 했던 현욱은 생각지도 못한 농담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해장국 집에 들어갔다. 나란히 앉은 지은과 창수의 손이 반짝였다.
“어! 새 반지네?”
민영이가 말했다. 지은이가 반지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응, 오빠 제대까지 잘 기다려줬다고 오빠 부모님께서 맞춰주셨어.”
민영이는 지은이의 손에 낀 반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지은이가 반지를 보라고 손을 내밀다가 아예 반지를 빼서 민영이 손에 끼워주며 보라고 했다.
“근데 니들은 커플링 안 해? 이 새끼, 이거 안 되겠네. 현욱아 아무리 무뚝뚝해도 여자는 중간중간 약을 쳐줘야 조용한 거야. 몇 년을 만났는데 실가락지 하나를 안 해주냐. 그리고 어릴 때 해야 대충 가느다란 거 고른다. 늙으면 자꾸 두꺼운 거 골라서 더 비싸져. 하하하.”
창수가 자기 딴에는 농담이랍시고 말했다. 그 말에 현욱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돈 있으면 여행을 가지. 반지는 답답하기만 하고... 암튼 난 반지 같은 악세사리 별루.”
민영이는 반지를 빼서 다시 지은이에게 돌려주었다. 지은이는 다시 반지를 끼고는 웃으며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현욱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결혼은 언제 해?”
“원래 올해 여름에 나 졸업하면 식 올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지은이 약학 고시 패스하고 해야 할 것 같아. 뭐 엄마가 그렇게 하라니 별 수 있나. 그리고 나도 이번 달에 사진 스튜디오 오픈하니까. 한 1~2년 정신없을 거고. 아빠가 사진학과 석사를 따는 조건으로 스튜디오 오픈해주기로 하셨거든. 아버지도 참 답답한 게 진작 사진을 허락해줬으면 대학 4년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게다가 다 늙어서 또 석사를 해야 한다니 짜증 나. 그냥 사진기 들고 여행이나 하고 싶은데.”
밥이 나왔다. 밥을 먹으며 지은이는 제주 여행 이야기를 또 꺼냈다. 다시 한 번 같이 놀러 가지고 권하는 것이었다. 현욱이는 밥만 먹으며 지은에게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민영이는 대충 지은이 기분 맞춰주면서 돌려 돌려 거절하느라 밥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밥을 먹고 자연스럽게 창수가 계산서를 들었다. 현욱이 인사치레로 말했다.
“오늘은 내가 내려고 했는데. 고맙다.”
“아녜요. 우리 오빠가 내야지요.”
지은이가 웃으며 말했다. 창수는 이미 계산대에 서 있었다. 민영이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밖에 나와 보니 창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머지 셋은 창수로부터 약간 떨어져서 껌을 나눠 씹었다.
“우리 다 같이 커피 마실 까요?”
민영이가 말했다.
“그럴까? 그럼 저기 커피빈 갈까? 내가 살게.”
창수가 담배를 든 손으로 근처 커피숍을 가리켰다.
“아녜요. 이번엔 우리가 낼게요. 왜 매번 오빠가 다 내요.”
민영이가 웃으며 말했다.
“됐어. 내가 사나 현욱이가 사나 뭔 상관이야. 내가 있을 때는 다 내가 내야지.”
창수가 담배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그래. 민영아 왜 서운하게 그렇게 말해. 그러지 마. 그런데 오늘은 커피는 아닌 것 같아. 오늘 너 시험 끝나고 첫 데이트잖아. 둘이 오붓하게 시간 보내야지. 창수 오빠, 우리는 오늘 빠지자.”
“그래? 그건 그렇네. 그럼 다음에 한잔하자. 캬~악 퉤!”
창수가 담배꽁초를 버리면서 바닥에 가래를 뱉었다. 지은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창수의 차가 떠나자 민영은 현욱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리 어디 갈까?”
“나야 모르지. 너 가고 싶은데 있어?”
“어?.……. 아니…….”
민영은 당황했다.
“오빠 뭐 준비한 것 없어?”
“없는데.”
현욱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빠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아니, 내가 기분 안 좋을 게 뭐가 있는데? 왜? 넌 기분 안 좋아? 내가 창수처럼 차도 없고, 돈도 없으니까 불편해?”
민영이는 팔짱을 풀고 현욱이를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차 타지 말자고 했잖아.”
“차비 좀 아끼려고 했지.”
“그럼 밥은 왜 먹어?”
“밥값도 아끼려고 했다. 왜?”
현욱이 버럭 하자 민영은 슬슬 화가 났다.
“돈은 내가 있잖아. 왜 그래 정말 못나게?”
“그래 내가 병신이다.”
현욱이 소리를 질렀다. 민영이는 당황스러웠다. 사람들이 둘을 쳐다보았다.
민영이는 뒤돌아 길을 갔다.
씩씩대던 현욱은 민영이가 가버리자 순간 아차! 싶었다. 뛰어가서 민영이 팔을 잡았다.
“미안해.”
현욱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민영이는 현욱이가 불쌍해 보였다. 마음이 약해졌다. 민영이가 아무 말도 안 하자 현욱이는 마음이 다 풀렸다고 생각해서 민영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 영화 볼까? 커피숍 갈까? 시험 끝나고 첫 데이트인데 우리 예쁜이 뭐 하고 싶오?”
민영이는 못 이기는 척 현욱이가 이끄는 대로 발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