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8. 그만하자

Chapter 4. 사랑은 순식간에 이별은 천천히 (2)

by 이그나이트

민영이는 현욱이가 불쌍해 보였다. 마음이 약해졌다. 민영이가 아무 말도 안 하자 현욱이는 마음이 다 풀렸다고 생각해서 민영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 영화 볼까? 커피숍 갈까? 시험 끝나고 첫 데이트인데 우리 예쁜이 뭐 하고 싶오?”


민영이는 못 이기는 척 현욱이가 이끄는 대로 발을 뗐다.






현욱은 민영이를 데리고 일단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커피숍에 들어갔다. 일요일이라 사람이 많았다. 현욱은 민영이를 끌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커피 뭐 마실 거야? 주문해야지.”


민영이가 말했다.


“꼭 커피 마셔야겠어?”


“응? 무슨 소리야. 들어왔으니 마셔야지.”


"돈 아깝잖아. 맛도 없는 거 비싸기만 하고. 게다가 이따가 모텔 가면 커피도 다 있는데 거기 가서 마시자."


민영이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나란히 앉은 현욱은 민영이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몰랐다.


“그럼 왜 들어왔어? 나가.”


민영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잠깐만. 다리도 아픈데 어디 갈지 정하고, 우리 예쁜이 기분도 풀고 나가자.”


현욱은 일어서려는 민영이를 꼭 안았다.


“뭐해? 주문도 안 하면서 여기서 스킨십하려는 거야?”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 추우니까. 어디 갈지 정하고 가자는 거지. 뭐가 그리 급해. 우리 바로 모텔 갈까?”


“모텔?”


현욱이가 민영이를 꼭 안으며 말했다.


“모텔 가면 커피, 영화, 만화 다 있잖아. 여기저기 안 다녀도 되니까 제일 싸고. 나도 어제 늦게까지 알바해서 피곤하거든.”


“싫어. 지금은 싫어.”


민영이는 현욱이에게서 몸을 빼내면서 말했다.


“그럼 뭐 할 건데?”


민영이도 딱히 하고 싶은 게 생각나는 건 아니어서 바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 영화 보자. 극장 간지 너무 오래됐어. 영화 보고 싶어.”


“나 오늘 돈이 많지 않아.”


민영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속으로 모텔 갈 돈은 있고 영화 볼 돈은 없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오늘은 내가 낼게. 나 용돈 받은 거 많아. 영화 보고 밥 먹고, 그러자. 오늘은 모텔 싫어.”


“...... 알았어. 그럼 핸드폰으로 할인되는 거 있나 알아보자.”


현욱은 핸드폰을 꺼냈다. 민영은 빈 테이블이 너무 신경 쓰였다. 그래서 현욱이 핸드폰으로 영화를 예매할 동안,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서서 커피를 한잔 사 왔다.


커피를 본 현욱이 테이블의 커피를 집으며 ‘커피를 왜 사. 돈 아깝게. 금방 나갈 건데.’라고 말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민영이에게 카톡을 날렸다.


카톡! 카톡!


두 개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민영이가 보니 하나는 영화할인권 링크 주소였고, 하나는 모텔 할인권 링크였다. 민영은 현욱을 쳐다봤다. 현욱은 씩 웃었다. 민영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뭐야. 자꾸 왜 이래. 영화만 예매할 거야. 모텔은 돈 안내.”


“에이~. 모텔은 내가 해야지. 이따 영화 보고 모텔 가자. 이 모텔이 극장 바로 옆이고 분위기도 좋데. 그래야 좀 더 오래 있지. 영화 보고 밥 먹고, 그럼 또 할게 없고, 갈 데가 없잖아. 모처럼 데이트인데 그렇게 일찍 헤어지기 싫어서 그래.”


현욱이 웃으며 커피를 또 한 모금 마셨다.


“오늘은 가기 싫다고 말했잖아.”


민영이가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현욱은 화난 민영이의 얼굴을 보고는 이제야 입을 다물었다. 왜 민영이가 저렇게 날카롭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짜증내는 민영이에게 뭐라고 할까 했지만 참았다. 이제 막 시험이 끝나서 그런가 보다 추측만 할 뿐이었다.


영화는 금방 끝났다. 영화를 보고 나온 둘은 잠시 극장 의자에 앉았다. 민영이는 간만에 본 영화에 취해 아직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의 이 떨림을 좀 간직하고 싶었다. 예술 감상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때 대뜸 현욱이 말했다.


“이제 뭐 하지? 아직 4시밖에 안됐네.”


현욱의 말에 민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4시 밖에? 벌써 4시가 아니고?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재미없어?”


민영이 화나서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간만에 데이트인데 뭐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런 거야. 오해하지 마. 또 돈도 별로 없으니까....... 저녁은 뭐 먹지?”


현욱이 얼른 말했다. 돈이 없어서 그렇단 말에 민영이는 현욱이가 또 불쌍해 보여서 화가 좀 누그러졌다.


“그래... 알았어. 내가 밥도 다 쏠 테니까.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자. 오빠 뭐 먹고 싶어?”


“그래? 우와 좋은데. 그런데 니 돈도 아껴야지. 니 돈이 내 돈인데 밥 먹고, 술 먹고 다 돈이잖아. 먹고 나면 똥 되는 거에 너무 돈 쓰지 말자. 적당한 거 뭐 없나......

아! 그러지 말고 우리 햄버거랑 맥주랑 사서 모텔 가자. 편하게 먹고 마시고, 나올 때 씻고 나오면 더 좋고. 어때? 밥 먹고 또 어디 갈까 고민하는 것도 귀찮고.”


민영이는 한숨이 푹 나왔다.


“오빠, 정말 왜 그래? 원래 안 그랬잖아? 발정기야?”


“뭐? 발정기?”


현욱은 민영이의 발정기란 말에 속에서 욱!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마치 여자한테 ‘너 생리하냐?’하는 말하는 것과 같은 기분 나쁨이었을 것이다.


“아. 알았어. 미안해. 그 말 취소.”


민영이가 얼른 말했다. 현욱은 이 상황에서 더 이상 화를 내기도 뭣하고 기분은 나빠져서 입을 다물었다.


둘 다 영화 팸플릿만 만지작거리며 침묵의 몇 분을 보냈다.


“오빠, 우리 닭갈비에 소주나 한잔 하자.”


민영이가 말했다. 현욱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고기를 먹어서 그런지 현욱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민영이도 소주를 한잔 하고는 표정이 좋아졌다. 둘이 서로 술도 따라주고, 쌈도 싸주고 맛있게 먹고 마지막으로 볶음밥을 비벼서 눌러 누룽지를 기다렸다.


앞치마를 두르고 소주 기운에 얼굴이 벌개진 민영이 현욱에게 말했다.


“근데 오빠, 이제 2년 그러니까 4학기 남은 거지? 벌써 3학년인데, 취업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취업? 뭐...... 엄마는 공무원 시험 보라고 하고, 아빠는 아빠 사업 도와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라. 흐흐. 근데 취업을 하려고 보니 스펙 때문에...... 쉽지 않은 것 같아. 토익부터 해서 준비할 것도 많은데,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딨어? 당장 등록금, 생활비 대기도 빠듯한데. 게다가 삼수한 것 때문에 알만한 데서는 안 받아 줄 것 같아. 안 그래도 이것저것 생각도 많고 그러네.”


현욱이가 넋두리를 시작했다. 민영이가 현욱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그럼 공무원밖에 없네. 공무원 시험 보면 어때? 울 아빠가 그러는데 없는 사람은 공무원이 제일 좋데. 누구를 만나던지 기본은 되니까.”


“...... 사업은 왜 안되는데?”


“사업은 아니지. 오빠네 아빠도 망...... 아니 잘 안 풀려서 지금 집안이 힘든 거 아냐? 근데도 사업하겠단 말이 나와? 게다가 오빠가 자본이 있어, 아이템이 있어? 아무것도 없는데 사장은 누가 그냥 주는 줄 알아? 또 무슨 사업이던지 그 바닥에서 월급 받고 3년은 일해봐야 하는 거잖아. 아무나 사장하나.”


현욱은 기분이 나빴다. 내심 창업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욱은 소주를 원샷했다. 민영이는 그런 현욱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주걱으로 볶음밥을 뒤적이며 말했다.


“밥 다 됐다. 먹어.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오빠 공무원 되고, 나 회계사 되는 게 가장 보기에도 괜찮을 것 같아. 행정 고시까지는 사정상 힘들 겠지만, 7급은 쉬우니까. 오빠 머리도 좋고, 지금부터라도 7급 준비하면 졸업할 때 합격하지 않겠어? 힘들겠지만, 한 번 생각해봐. 내가 도와줄게.”


“지금은 남들 보기 창피해?”


현욱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민영이가 주걱을 놓고 현욱을 바라봤다.


“남들 보기도 좋고 괜찮을 거 같다며? 그럼 지금은 남들 보기 안 좋다는 거 아냐?”


“그런 말이 아니잖아. 오빠 왜 그래? 오늘 하루 종일 진짜 짜증 나게.”


“너야말로 오늘 하루 종일 왜 그러는데?”


“내가 뭐?”


“휴~. 됐다.”


뭣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지 자세히 하나씩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단추를 잘못 잠근 셔츠를 입은 것처럼 하루 종일 불편한 기억만 날 뿐이었다. 언짢은 기분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이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나 휴가 나오고, 제대했을 때는 축하 준비 같은 것도 없이 귀찮다는 듯이 모텔이나 가자고 해놓고, 너 시험 끝난 오늘은 모텔도 싫다면서 뭐 대단한 거나 바라고 있고. 나보고 어쩌라고.”


욱 하는 마음으로 생각 없이 말을 던지자마자, 현욱은 바로 ‘실수다’라고 생각했다.


볶음밥을 뒤집던 민영이가 바로 술이 깬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현욱을 똑바로 쳐다봤다.


현욱은 그 눈을 피해 벌떡 일어났다. 말싸움으로 자기 무덤을 판 것 같았지만, 이대로 지기 싫었다. 왠지 자존심을 걸고 오늘은 이기고 싶어졌다.


민영이가 주걱을 쥔 채 말했다.


“뭐해?”


“갈 거야.”


“간다고? 지금? 어딜?”


“몰라. 나갈 거야. 잡지 마.”


현욱이 주섬주섬 물건을 챙겼다. 민영이가 굳은 표정으로 주걱을 내려놨다.


“지금 그렇게 나가면 우리 끝이야.”


현욱이 짐을 챙기고는 민영이를 슬쩍 바라보고는 휙 나가버렸다. 민영이는 황당한 표정으로 현욱을 바라보았다.


현욱은 가게 앞에서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민영이가 없었다.


현욱은 멈춰서 민영이를 기다렸다.


하지만 민영이는 나오지 않았다.


현욱은 ‘씨발’ 하고 혼잣말을 하고는 다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민영이는 소주 한 병을 더 시켜서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현욱이가 자리에 앉았다.


“꺼져.”


민영이가 낮게 말했다.


“미안해.”


현욱이 말했다.


“나가.”


민영이가 말했다. 현욱이는 대답을 안 하고 민영이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나쁜 새끼.”


민영이가 현욱이를 째려보더니 그 소주를 버리고는 다시 소주를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민영이가 주인에게 카드로 계산을 했다. 현욱이가 민영이 뒤에서 얼쩡대며 얌전히 서 있었다.


민영이는 가게 밖으로 나와 손을 들었다. 택시가 민영의 앞에 섰다. 현욱이가 택시 문을 열어주자 민영이는 자연스럽게 택시에 타고는 현욱이가 타기 전에 문을 닫았다. 현욱이가 어버버 하는 사이 택시가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