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5. What I Want

Chapter 1. What I Want (2)

by 이그나이트

"암튼 잘 모르겠어요. 비정상회담 보는 것보다 재밌을 것 같아서 나가긴 할 건데. 한두 번 보면 끝일 것 같아요."

마침 음식이 나왔다. 다들 젓가락을 드는데 김부장님만 민영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


“민영 회계사님이 진짜 배가 불렀어요. 그런 뻔한 연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요? 연애, 사랑, 결혼 같은 것을 하지 않으면 정말 나처럼 더욱 빤~하게 늙어 죽는다구요. 고마운 줄 알고 노력해봐요. 나처럼 안되려면.”


김부장은 농담 반, 진담 반처럼 말하지도 않고,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들어도 진심으로 솔직하게 그리고 민영이를 위한 선배의 말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김부장님의 말의 무게에 민영이는 대꾸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민영이는 김부장님이 얼마 전 35살 생일을 맞이했으며, 현재 애인이 없다는 것을 새삼 생각했다. 게다가 김 부장님은 언제나 사랑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었기 때문에 연애가 결혼까지 이루어지기도 쉽지 않고, 선이나 소개팅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으며, 어떻게 어떻게 연애를 시작했어도 가정 형편을 알고 나면 다들 도망갔다는 누군가의 뒷담화도 떠올렸다.


‘나와는 좀 다른 케이스긴 하지. 하지만 어쨌든 나도 노처녀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조언은 좋게 받아들이자. 암튼 가만히 있지 말라는 말이잖아. 그 정도야 뭐, 가만히 있어도 날 가만두지는 않으니까. 할 수 있지."

혼자 생각에 민영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회계사님이 말했다.

“김부장님 근데요. 사랑이라는 것, 감정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요. 이혼한 내가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연애니 사랑이니 그게 노력으로 되나요? 자기가 가진 기준에 부합한다고 해도 땡기는 뭔가가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암튼 사랑은 데이트 10번 한다고 해서 생길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거예요. 뭐 하룻밤 정도는 보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사랑을 하고 결혼하는 것은 사실 인사할 때, 3초 만에 결정되는 거 아닌가요? 노력해서 될 일은 아니라는 거지요. 정말 인연인 거고요. 그러니까 김부장님, 자기도 그냥 아직 연을 못 만난 거예요.”


3명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김부장님도 진지하게 듣더니 말했다.

“맞아요. 이회계사님 말도 맞는 거 같아요. 내가 마음을 안 열거나 노력을 안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억울하게 나보다 못난 놈들도 시집 장가는 다 가더라구요. 아 억울해. 그리고 배 아파.”


“그렇다고 또 배 아파하지 마세요. 다들 결혼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니까. 나 봐요. 이혼했잖아.”


김부장은 이회계사의 이혼발언에 자연스레 웃었지만, 두 선배들의 셀프 디스에 민영이와 승민씨는 ‘음...’ 하며 어색한 표정을 숨기려 젓가락을 들었다.

민영이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선배님들 드세요. 우리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네 명은 젓가락을 들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카톡 메시지가 다시 울렸다.

[좋아요. 민영씨 이따 봐요. 기대해도 좋아요. 내가 준비 많이 했어요^^]


하지만 민영이는 핸드폰을 뒤집어 화면을 보지도 않았다.

6시 정각, 민영은 벌떡 일어났다. 책상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화사한 개나리 색 봄 코트에 산뜻한 주황색 가방을 들고 민영은 책상 위의 거울을 한번 봤다. 가방에서 립글로스를 꺼내 한번 발랐다.

파티션 밖으로 나온 민영은 일하는 직원들에게 밝게 인사하며 제일 먼저 사무실을 나갔다.


“저 먼저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민영이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1층을 누를까, 차가 있는 지하 1층을 누를까 고민했다. 결국 1층을 눌렀다. 밥 먹고 술을 마실 수도 있고, 또 2차까지 하게 된다면 이동할 때 차가 2대이면 불편할 것 같았다. 민영은 건물을 빠져나와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에 가는 길에 김부장님에게 카톡이 왔다.


[아까 나가는 거 봤어. 민영회계사님 내가 나이 많은 선배로서 말할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평범하게 연애해서 결혼할 생각해요. 이리저리 생각만 많이 하다가 나처럼 늙으면 답이 없어. 대표님도 따님 걱정이 많으셔요. 회사도 물려받아야 하니 더욱 고민이 많으시지. 내가 오지랖이라고 생각은 들지만, 나 좋다는 사람 있을 때 마음을 열고 잘 봐요. 아무리 모든 것은 인연이라지만, 인연도 기회도 가만히 있으면 더 안 오는 법이거든.

암튼 오늘 즐거운 데이트 하세요. 후기도 부탁하고. 아이고 나 주책 맞게도 드라마보다 더 기대돼요.]


김부장님의 카톡에 민영은 [넵. 후기도 잼나게 알려드릴게요.^^] 하고 답을 했다.

카톡 메시지를 보내고, 민영이는 창 밖을 봤다.

퇴근 시간이어서 그런지 길이 많이 막혔다. 지는 해가, 마지막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28살 한창 물오른 민영이의 아름다운 젊음 같았다. 민영이는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으로 해가 지는 것처럼, 아름다움도 사라지고 나 좋다는 사람도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해가 지면, 별이 뜨겠지. 김부장님 같은 노처녀가 될 마음이 없는 것이지, 꼭 결혼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은 없었다. 지금 부족한 것이 없으니까 그냥 이대로 쭉 살면서 여행도 하고, 하고 싶은 공부나 취미 하나 만들어서 지내면 그럭저럭 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민영이는 작게 하품을 했다. 빨리 오늘 만남을 정리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민영은 오늘 만날 남자의 sns에 들어갔다.

김재용, 32살, 세무사. 온라인 사진 동호회 동료가 자기 오빠를 소개해주었다. 얼굴도 키도 직업도 다 중간은 되는 괜찮은 남자였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래도 혹시 오늘 만나면 좀 다르지 않을까? 민영은 좀 전에 생각했던 도도함과는 다르게 순간 작은 기대를 품었다.

재용씨는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좀 늦었나요?”


“아니에요. 제가 빨리 도착했지요. 앉으세요.”


웨이터가 와인을 들고 왔다.


“제가 먼저 와인이랑 식사를 다 주문해놨어요. 괜찮으세요?”


“네 좋아요.”


“차는 가져오셨나요?”


“아뇨 택시 타고 왔어요. 와인 좋아요. 주세요.”


웨이터가 와인을 오픈하고 한 잔 따라주고는 병은 옆에 두고 갔다.


“스테이크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잘 됐네요. 건배부터 할까요?”


둘은 잔을 들어 한 번 웃고 한 모금 마셨다. 민영은 와인 향기를 먼저 마시고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천천히 삼켰다. 예전에 배운 와인 마시는 법대로 한 것이다. 오늘 와인은 달지 않고 적당히 씁쓸한 것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민영은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먹고 나면 입가가 검어지는 것도 싫고, 맛도 병마다 다르니 맛을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와인을 좀 알아야 이런 레스토랑에 와서 창피를 당하지 않을 것 같아 일부러 공부까지 해서 기본은 익혀 두었었다.


“좋은 와인인가 봐요. 맛있네요.”


민영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저녁을 다 먹고도 재용씨는 팔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는 한강이 보이는 호텔의 바에 가자고 했다. 아직 시간은 8시밖에 안됐기에 거절하기도 뭣했다. 민영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 기사가 운전을 하고 뒤에 나란히 앉아 자리를 옮겼다. 재용 씨는 계속 말을 걸었다. 회사 분위기는 어떠냐. 부모님은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 차는 얼마나 됐냐. 드라이브 좋아하냐. 휴가는 어디로 가냐.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그래도 정적 없이 흘러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민영이는 괜히 대리 기사가 신경 쓰여 되도록 말을 아끼며 대답했다.

한강이 보이는 바에 앉아 재용씨는 술을 깨기 위해 커피를 시켰고, 민영이는 위스키를 시켰다. 홀짝이는 민영이를 보며 재용 씨는 뭔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위스키를 반쯤 마셨을 때, 재용씨가 팔찌를 꺼냈다. 민영이는 몰랐다는 듯 깜짝 놀란 척을 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팔찌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재용 씨가 민영이 옆자리로 옮겨 앉아 팔찌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민영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민영 씨, 나이 먹고 이런 기분 오랜만이에요. 설레고 잘해주고 싶어요. 민영씨 사랑해도 될까요?”


민영이는 자기의 손을 잡고 있는 재용씨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 이 남자랑 한번 자 볼까?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자고 나면? 그다음엔? 어떻게 떼어네지? 동호회에 소문나면? 이 사람 여동생이자 같은 동호회 회원이 알게 되면? 민영이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갑자기 민영이는 그 모든 것이 버겁고 귀찮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받을 수 없어요.”


재용씨는 놀라 했다.


“왜요?”


“부담스러워요. 너무 비싸요. 우리 아직 몇 번 만나지도 않았잖아요. 좀 더 알아보고 사귀던 사랑하던 하게 되면 그때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재용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민영씨. 내가 나이도 있고요. 이 정도는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나 그 정도 능력은 되는 사람이거든요. 그냥 가볍게 꽃다발 받았다고 생각해도 돼요.”


민영은 재용씨가 말을 하는 동안, 잡혔던 손을 빼고, 잔에 있던 위스키를 한 입에 털어 넣고, 물을 한 입 마셨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일어났다.


“오늘은 먼저 갈게요. 미안해요. 다음에 봐요.”


재용은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인상을 쓰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민영이는 재용씨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뒤 돌아 걸어갔다.

몇 초 뒤에, 남자가 엘리베이터 앞에 뛰어 왔다.


“내가 무슨 잘못 했어요? 팔찌가 맘에 안 들면 다음에 같이 가서 골라볼래요?”


“그런 거 아니에요. 미안해요. 그냥 아직은 모든 게 너무 빠른 것 같아서 그래요.”


“난... 지금 민영씨가 잘 이해가 안 되어서요.”


“재용씨 잘못 없어요. 그냥 말 그대로 오늘은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집에 데려다 줄게요.”


“아니에요. 혼자 있고 싶어요. 미안합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빈 엘리베이터였다. 민영이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고개를 숙이고 로비 버튼 그리고 닫힘 버튼을 꾹 눌렀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화장을 한 젊고 세련된 여자가 그 속에 있었다. 민영이는 지금 도대체 본인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 여기가 몽롱하게 느껴졌다.

문이 열리고 남자와 여자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객실 층이었다. 남자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남자가 여자에게로 고개를 숙이고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 모습이 귓가를 애무하는 것 같았다.

민영이의 아랫배가 꿈틀거렸다.

민영이는 사실 그냥 남자가 만나고 싶었다. 애인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남자가 그리웠다. 지난 몇 년 동안 목욕탕 때밀이 아줌마 외에는 민영이의 몸을 만진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러닝 머신 타듯 격렬하게 섹스를 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파트너 하나 정해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마다 만나서 시원하게 섹스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날에는 귀찮게 연락 같은 거 안 하고 말이다.

민영이가 원하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 외에는 굳이 연애니 사랑이니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 날 때마다 어디 있는지 보고해야 하고, 주말이면 피곤해도 만나야 하고, 기념일 챙기고, 또 나도 감당 안 되는 내 인생을 걸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들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또 언니를 보면서 결혼 자체에 대한 회의도 많이 들었다. 영화 같은 사랑은커녕, 사랑인지 아닌지 생각할 틈도 없이, 몇 평에 살고, 니가 아깝나 내가 아깝나 서로 재면서, 결혼 몇 년이 지나도 예단이, 혼수가 어쩌고, 시어머니가 어쩌고, 여행, 아니 미용실 한번 가려고 해도 마음대로 못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사실 몇 번, 가볍게 사귀는 것을 시도하긴 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섹스하고 나면 무슨 주인이라도 된 듯 구속하기 일쑤였고, 민영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이름과 아빠 회사 이야기만 들어도 바로 결혼이 어쩌고 하며 빨리 잡으려고 했다.


아니 사실은 자고 나면 민영이의 마음이 변하곤 했었다. 그 사람의 다음 모습이 궁금하지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그 남자와 부부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데 어디까지 선을 긋고 행동해야 쿨한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곤 했다. 게다가 그 남자와 함께 아는 주위 사람들이 섹스한 것을 눈치채고, 민영이를 유부녀처럼 대하기라도 하면 또 짜증이 나서 다 때려치우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남자가 그리울 때는 클럽을 가거나, 채팅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막상 그렇게까지 행동으로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1층, 로비에 도착했다.

두 남녀가 나갔다. 민영이는 남아 있는 남자의 페로몬이라도 마시고 싶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민영이는 집에 가는 길에 맥주와 오징어를 사서 밀린 미드를 보며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새 미드는 웬만한 야동이나 에로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볼만하다.

호텔 로비도 어색해서 민영이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


“민영아, 주민영!”


민영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잘못 들었구나 싶어 민영은 다시 발걸음을 뗐다.


그때.


“야, 주민영.”


누가 민영의 어깨를 툭 쳤다. 민영이 뒤를 돌았다. 거기에 지은이가 있었다.


“지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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