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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43. 라라라

Chapter 3. 29, 순수하되, 순진하면 안 되는 (3)

by 이그나이트

현욱은 8차선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지자 사람들이 길을 건너갔다. 하지만 현욱은 정장 재킷을 여미며 그 자리에 서서 민영을 기다렸다. 세 번째 파란 신호등이 켜졌을 때, 민영의 차가 현욱 앞에 섰다.


현욱은 조수석에 있는 프라다 가방을 들어 무릎에 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인사도 없이 현욱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백화점 들렸다 가면 늦지 않을까?”


“괜찮아. 차도 안 막히고, 지은이도 애 맡기느라 조금 늦을지도 모른다고 전화 왔어. 아예 식당에 전화해서 10분 늦을지도 모른다고 미리 말해놔.”


“그래 그러자.”


현욱은 전화기를 꺼냈고, 민영이는 백화점으로 운전대를 움직였다.


오늘은 지은이의 생일이었다.


민영이를 뺀 셋이 몇 번 만나 사업 이야기를 했지만 지은이는 계속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살짝 현욱이를 피하는 눈치도 보였다.


그래서 현욱이가 민영에게 지은이 생일 파티를 핑계로 자리를 마련하라고 시킨 것이다, 민영이는 그런 자리가 너무 싫었지만 현욱이가 끈질기게 요구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민영이는 지은이에게 ‘애 엄마 된 첫 생일인데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 모처럼 다들 정장 입고 만나서 기분 내자’며 더블데이트 분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현욱은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지은이가 선물을 좋아할까?”


“백화점 선물은 맘에 안 들면 교환하면 되니까. 걱정 마. 그리고 우리가 살 스카프 괜찮아. 지은이 스타일이고, 명품이라 좋아할 거야.”


“그래. 그럼 좋겠다.”


현욱이가 이번엔 두 손을 허벅지 아래로 찔러 넣으며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했다.


“오빠, 뭐 면접 봐?”


“뭐?”


“긴장하냐고.”


“긴장까지는 아닌데. 지은이가 좋은 대답을 해주면 좋겠어서. 지은이가 완고하게 거절하면, 창수도 포기할 테고 그러면 아무래도 다시 계획을 세워야 하니까. 아무튼 오늘은 지은이가 확답을 주면 좋겠어.”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 시간은 많으니까.”


민영이는 나름의 진지함으로 말을 했지만, 무뚝뚝한 말투에 현욱이는 순간 여자친구의 무심함에 화가 났다. 발끈한 현욱은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사업에 자본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시간이 왜 없는지 설명하려다가 굳은 표정으로 운전하는 민영의 옆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친한 친구에게 사업 투자를 권하는 이 상황이 민영이는 매우 자존심 상해했다. 돈을 빌려달라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몇 번을 설명했지만 민영은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벽창호 같은 민영을 보며 현욱은 답답하고 서운했지만, 그래도 이해 못하면서도 이런 자리도 마련해주는 민영이가 고마웠다.


현욱이가 늦지 않으려고 안달복달해서인지, 백화점에 들러 미리 찜해둔 선물을 사들고 약속 장소에 도착한 시간은 원래 약속 시간보다 10분 이른 시간이었다. 당연히 지은이와 창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약속 장소는 일식집의 룸이었다. 현욱이는 일식집 룸에 들어서자마자 어디에 누가 앉아야 좋을지 가늠해본 다음 본인은 문가에 앉았다. 민영이는 현욱이가 자리를 다 정하자, 그 옆에 앉았다.


현욱은 종업원을 불러 가장 비싼 코스요리를 주문했다. 그러자 깜짝 놀란 민영이가 종업원을 붙잡고 현욱이를 말렸다.


“잠깐만요. 오빠, 너무 비싼 거 아냐?”


“에이 이 정도는 해야 지은이도 좋아하고 마음을 열겠지. 얘들은 부자잖아.”


“부자라도 우리 형편껏 해야지. 가난한 사람한테는 싼 거 선물하고, 부자한테는 비싼 거 선물하고 그렇지 않잖아. 내 주머니 사정에 맞춰서 마음을 표현하면 되는 거잖아. 아무튼 그건 너무 비싼 것 같아. 중간으로 시키자. 어차피 지은이 다이어트랑 수유 때문에 잘 먹지도 못해.”


“됐어. 그냥 둬. 지은이가 안 먹더라도, 우리도 이런 좋은 분위기 간만인데 너도 먹는 거니까 좋은 거 먹자.”


현욱이는 결국 제일 비싼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나갔다. 민영이는 물을 쭉 들이켰다.


약속 시간보다 몇 십분 지난 후에야 지은이와 창수가 룸으로 들어왔다.


“민영아. 나 왔어.”


“그래, 지은아 오랜만이다. 그치? 잘 지냈어?”


“그래, 정말 보고 싶었어. 어휴 간만에 외출하니 기분 좋다. 호호호. 현욱 오빠 미안해요. 애 놓고 오다 보니 자꾸 지각하네요.”


“에이, 지각은 무슨. 애 엄마가 이 정도면 빨리 온 거지.”


현욱이 과하게 웃으며 지은이와 악수를 했다. 민영이는 창수와도 인사를 했다.


“창수 오빠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그래. 반갑다. 우리가 다 이렇게 모인 게 정말 얼마만이냐? 민영이는 진짜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오빠 얼굴 정말 좋아졌어요. 호호호.”


“자자자. 일단 다들 서 있지 말고 앉아서 말하자.”


다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종업원이 금방 음식을 가지고 왔다.


“우리 늙었네. 이런 곳에서 정장 입고 생일파티도 하고, 또 부모도 되고.”


현욱이가 창수 잔에 술을 한잔 따라주면서 말했다.


“그래 시간이 정말 순식간이야. 우리가 벌써 30대라니.”


“그러니까. 대학생 때는 닭갈비나 삼겹살이면 최고였는데 횟집 같은 거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이런 고급 일식집에서 커플 데이트도 하고 우리 많이 컸다. 그치? 어른이야 어른.”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지은이 29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민영이가 선물을 건넸다.


“어머 뭘 이런 것까지. 어머머 이거 한정판 신상이네. 진짜 예쁘다. 고마워. 잘 하고 다닐게.”


지은이가 선물을 풀어보고 좋아하며 말했다. 현욱이가 작게 긴장이 풀어지는 숨을 뱉고는 사방을 눈치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현욱을 본 민영이는 물을 또 쭉 마셨다.


가벼운 담소와 함께 다들 식사를 시작했다. 사업에 대한 말을 누가 먼저 어떻게 꺼낼지를 눈치 보는 게임을 하는 것처럼 다들 사업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그냥 겉도는 이야기만 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났다. 창수는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치고 배가 부르다며 바지 단추를 풀르더니 벽에 늘어지게 기대며 꺼억 트림을 했다. 지은이는 그런 창수를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마지막 수저를 끝내고는 입을 닦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다들 먹었지요??”


현욱과 민영이는 마지막 한 입을 먹으려던 젓가락을 놓고 지은이를 쳐다봤다.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지은이가 현욱이와 민영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벽에 늘어지게 기대고 앉은 창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도 생일 선물 받은 보답을 해야지...... 우리 투자하기로 했어. 현욱 오빠, 잘 부탁해요.”


지은이의 말에 현욱이가 ‘후아’ 하고 숨을 내뱉더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 고마워. 잘 생각했어. 후회 안 할 거야. 이미 부자지만 돈 더 만지게 해줄게.”


“그래요. 잘 부탁해요.”


지은이가 말했다. 순간 지은이와 민영이의 눈이 마주쳤다.


민영이도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원 하나쯤 있으면 나중에 우리 딸에게도 좋고, 학부모 직업란에 적기도 좋을 것 같더라고, 뭐 사실 뭘 하던 사진관보다는 낫겠지 싶어. 그런데 세세한 건 좀 조정해야 할 것 같아요. 상의할 부분들이 있어요.”


“당연히 계약서도 제대로 쓰고, 세세한 부분 다 명확히 해야지. 남들은 동업이 위험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안 되도록 꼼꼼하게 원칙대로 다 할 거니까. 내 성격 알잖아.”


“알지요. 그런데 그래도 여러 가지 예민한 부분들 일단 꼼꼼히 짚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 과정에서 오빠들 서로 맘 안 상했으면 좋겠고요.

일단, 가장 먼저 학원 위치를 대치동으로 해야 될 것 같아요. 우리 아버님이 대치동에 학원 건물을 하나 갖고 계시거든요. 그중에 한 층 내보내고 들어가면 좋지 싶어요. 나중에 한번 가봐요. 150평이라 좁지 않을 거예요. 위치도 좋고.”


“대치? 거긴...... 지은아, 내가 그 동네서 일했었잖아. 거긴 월세만 비싸고 자리 잡는 것도 상대적으로 쉽지 않고, 아...... 물론 아버님 건물이니까 월세 부담이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수익률이나 성공률을 보면 대치동에서 왔다는 프리미엄 갖고 시작할 수 있게 강북 쪽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물론 결정은 오빠들이 하는 건데요. 그냥 내 생각만 말하는 거예요. 일단 사는 데랑 가깝고, 월세도 공짜고, 또 현욱 오빠 학생들도 입소문 내주고 할 테니까 좋지 않냐 이런 말이에요. 그냥 이런 방법도 한 번 생각해보라고요.”


“그래, 자리야 일단 여러 군데 보는 게 좋으니까. 일단 한 번 가서 보고 말하자.”


현욱이가 조심스레 말했다.


“보면 오빠도 좋아할 거예요. 학원 건물로 오래된 곳이니까요. 아무튼 내일 창수 오빠랑 가보세요.


그리고 투자금 말인데요. 현욱 오빠는 우리가 5천, 오빠가 3천 해서 8천으로 시작하자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돈은 너무 적은 것 같아요.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우리가 그냥 일단 1억 투자할게요. 1억 투자에 월세 공짜.


그리고 오빠는 투자하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현욱이가 순간 멍해지면서 이해를 못하고 되물었다. 벽에 기대고 배를 내밀고 반쯤 누워있던 창수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넌 그냥 결혼이나 하라고. 얼마 되지도 않는 전 재산 여기다 집어넣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돈은 우리가 낼 테니까. 너는 일이나 하고, 단칸방이라도 얼른 구해서 결혼하라고. 내가 월급 줄게.”


“나보고 너 밑에서 일하라고? 니가 사장하고?”


현욱이의 얼굴이 굳었다. 지은이는 현욱이의 굳은 얼굴을 못 본 척하며,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 오빠는~~ 그렇게 받아들이면 안 되지. 우리는 기술이 없으니까 투자를 많이 하겠다는 거지. 그냥 돈은 우리가 다 낼 테니까, 오빠하고 싶었던 것들 다 편하게 하라는 거예요. 솔직히 창수 오빠는 아는 게 없잖아요. 일을 시킬래도 뭐 불안해서 시키겠어요?

그리고 오해 말아요. 월급쟁이처럼 그런 거 아니에요. 당연히 기본급에 수익금 분배할 거니까. 그냥 직원 같은 거 아니에요. 기분 나빠하고 그럴 거 없어요. 말 그대로 역할 배분이라고 생각해요.


딴생각 말고, 오빠가 하고 싶던 학원 편하게 다 해볼 수 있다. 그것만 생각하세요.”


“그래. 나는 부모님 보여줄 원장 방만 하나 주면 돼. 내가 이래 봬도 모르는 일에 깝치고 나서서 방해하지는 않으니까 걱정 말고. 어차피 학원에서 뭐 큰돈이 나오겠냐, 내 용돈 하고, 기름값 정도만 꼬박꼬박 나오면 되니까. 그러다가 한 일 년 지나면 월 500은 찔러 줄 수 있을 거고 말이야.”


창수가 노골적으로 수익금에 대한 욕심을 내비치자 지은이가 우아한 척 창수를 막았다.


“자기, 왜 그래. 부담 주지 마. 우리 수익은 신경 안 쓰기로 했잖아요. 그깟 1억 가지고 뭘 그래요.

아 참. 사실 시댁이랑은 이미 내가 거의 말 다 끝내 놨어요. 시부모님도 한량 같은 사진사보다는 원장이 더 좋긴 하대요. 그러니 큰 걱정 말아요. 호호.”


현욱이가 얼굴이 빨개져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난...... 동업만 생각했거든. 창수도 제대로 일을 해보고 배울 생각이 있는 줄 알았고. 음...... 아무튼 난 지금 휴...... 그동안 말한 거랑 다른 말이 나와서 당장 뭐라고 말을 못 하겠어......

좀 생각해보자.”


현욱이가 입을 닫고, 순간의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민영이가 다리가 너무 저려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모두 민영이를 보았다. 지은이가 민영이에게 말을 걸었다.


“참. 나 이번에 약국 개업하잖아. 아버님이 이 참에 약국 체인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셨어. 그래서 이번에 개업하는 약국 하고, 몇 군데 동시에 개업할 건데. 회계 장부 관련해서 너, 아니 네 아버님 회사에 맡길까 생각 중이거든. 니네 회사에 변호사도 있는 거 맞아?”


“응? 무슨 말이야?”


“아버님 돈으로, 내 이름으로, 약국 사업을 하는데, 너네한테 우리 회계 관련해서 일을 다 줄까 한다고. 언제 미팅 하자.”


민영이는 갑자기 손이 차가워져서 두 손을 상 아래로 꽉 잡았다.


“난 그런 건 잘 몰라. 그냥 장부 분석만 할 줄 알지. 내일 담당 부장님께 연락하라고 할게. 너한테 전화하면 돼?”


“응. 나한테 전화하라고 해.”


“어...... 그래......”


민영이는 원래 고맙다고 말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입을 뻥긋했지만, 너무 입이 말라서 물을 마시며 ‘고맙다’는 말을 삼켰다.


배를 쭉 내밀고 벽에 기대앉은 창수가 약간 혀가 꼬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


“우리 무슨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2세들 회동 같다. 집안 대 집안으로 기업 합병? 동반 계약? 뭐라고 하냐? 암튼 그런 거 하는 거 같아, 니들 결혼하면 꼭 아들 낳아. 우리 딸이랑 결혼시키자. 그래야 두 집안이 끈끈히 오래가지. 푸하하하.”


지은이는 창수의 주책에 한숨을 작게 쉬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창수가 술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했다. 다들 잔에 입만 대고 내려놨다. 창수는 남은 술을 원샷했다. 공기가 무거웠다.


민영이가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지은이에게 애기는 잘 크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지은이가 바로 핸드폰을 꺼내서 애기 사진이랑 동영상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대머리에 누워만 있는 애기 사진들은 모두 그게 그거 같았다. 딱히 예쁜 것도 모르겠지만 민영이는 연신 공주네, 예쁘네, 하면서 칭찬을 해줬다.


현욱이 '화장실 다녀올게'라고 말하며 일어섰다. 민영이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아이 사진을 열심히 봤다. 현욱이는 금세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런데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왜 그래?”


민영이가 살짝 물었다.


“화장실에 휴지통이 있었어.”


“그게 뭐?”


“휴지통에 바지가 닿은 거 같아. 찝찝해.”


“털면 돼지. 뭐 그런 거에 신경 써.”


그때 방문이 열리고 종업원이 차를 들고 들어왔다. 그런데 종업원이 다 듣도록 현욱이가 짜증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턴다고 다시 깨끗해지냐? 정말 화장실에 휴지통 있는 거 너무 싫어.”


“왜 그래? 화장실에 휴지통 없으면 얼마나 귀찮은데. 쓰는 사람이 조심하면 되지.”


민영이는 종업원을 신경 쓰면서 가게를 두둔했다.


“없다고 뭐가 문제 되는데? 휴지야 변기에 흘려보내면 될 걸, 왜 굳이 드럽게 똥 묻은 휴지를 봐야 하는데?”


종업원이 눈치를 보며 서둘러 조심스레 나갔다.


“뚜껑 닫으면 되잖아. 아무튼 여기서도 필요하니까 두었겠지. 남의 영업점에서 그런 식으로 말할 필요는 없잖아.”


“뚜껑 있으면 그 뚜껑에도 똥이 묻겠지. 아무튼 화장실 휴지통 정말 싫어. 너무 싫어.”


“어휴... 사람이 왜 그렇게 예민해? 아무튼 화장실에 휴지통 없으면 불편해서 안돼. 있긴 있어야 하는 거야.”


“너 뭐야? 내가 싫다는데, 왜 자꾸 토를 달아? 니가 이 집 사장이야? 화장실 휴지통 나는 용납 못한다고.”


“정말 왜 그래? 사람들 다 있는데? 종업원도 다 보는 데서 왜 그래? 굳이 일하시는 분 눈치 보게 만들어야 해? 암튼 난 화장실에 휴지통 없으면 불친절해서 싫어. 여자들은 화장실에 휴지통이 필요해. 생리대 같은 것도 나오고, 화장하고 나면 버릴 휴지도 또 나오고.”


현욱이가 민영이를 노려보았다.


“아무튼 나는 싫어.”


“그래? 난 좋아. 난 필요해. 오빠네 집에서도 휴지통 없어서 얼마나 불편했는데. 난 내 집에는 휴지통 둘 거야.”


현욱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절대 안 돼. 그렇게 드러운 똥 묻은 휴지 따위 모으고 싶지 않아. 난 만지기도 싫어.”


민영이도 지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누가 만지래? 안 만지면 될 거 아냐. 쓰지도 말고 만지지도 마. 니가 안 쓰면 될 거 아냐.”


“안 돼. 내 집에는 안 돼!”


“왜 안 돼? 내 집에는 꼭 있어야 해. 내 집에는 꼭 둘 거야!”


소리를 꽥 지르고 난 민영이가 순간 입을 다물고 눈알을 굴렸다. 지금 단 둘이 있는 게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지은이와 창수가 둘이 손을 잡고 현욱과 민영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민영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 먼저 갈게. 미안해.”


민영이가 벌떡 일어나서 순식간에 가방을 들고 방을 나왔다.


집에 들어온 민영이는 핸드폰이 들어있는 가방을 옷장에 넣었다. 집에 올 때까지 현욱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민영이는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소파에 앉았다. 엄마와 아빠가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텔레비전에서는 티비 조선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민영이가 팔을 뻗어 리모컨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아빠가 말했다.


“그냥 둬라. 재밌구만.”


민영이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잠시 그냥 앉아 있던 민영이는 아나운서들이 북한 아나운서처럼 목청껏 전달하는 내용이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서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왔다.


민영이는 노트북을 켰다. 민영이는 MBC에 접속해서 무한도전 다시 보기를 클릭했다.


영상을 다운받는 동안 민영이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기도 싫었다. 다 싫었다.


무한도전이 시작되었다. 영상에서는 계속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민영이의 얼굴은 다큐멘터리를 보듯 굳어있었다.


다음날 아침 6시 민영이가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노트북이 환하게 켜 있었다. 민영이는 노트북을 끄고 눈을 비볐다. 옷장 속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 10통, 문자, 카톡이 줄줄이 와 있었다. 현욱이었다. 민영은 모두 읽지도 않고 삭제해버렸다.


민영이는 씻고, 엄마가 챙겨준 선식을 먹고 집을 나왔다. 주차된 차 앞에 현욱이가 서 있었다.


“뭐야?”


“어제 그렇게 가버리고는 전화도 안 받고 뭐하는 거야?”


“나 출근해야 해.”


민영이가 차에 탔다. 현욱이가 얼른 조수석에 탔다.


“같이 가. 가면서 이야기해.”


민영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영아, 일단 어제 일은 우리 둘 다 잘못한 거 알지?”


민영이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둘 다?”


“나도 예민하게 굴었지만, 너도 지지 않았잖아. 그리고 이 중요한 순간에 그렇게 팩 하고 나가버리면 내가 뭐가 되고 지은이는 뭐가 돼. 어린애도 아니고, 너도 잘 못했잖아.”


“오빠. 지금 사과하려고 온 거 아냐?”


“이야기하려고 온 거야. 물론 내가 그 자리에서 예민하게 행동한 것도 사과하고 싶기도 하고.”


“흠......”


“어제 좀 분위기가 그랬지? 창수네가 돈 많은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어. 게다가 내 아이템을 이용해서 날 고용한다는 것에 내가 좀 기분이 안 좋았어. 배신감도 들고. 그래서 내가 예민했던 것 같아. 게다가 지은이도 갑자기 너한테 이상하게 갑질이랄까? 뜬금없는 행동도 하고.”


“그래서?”


“...... 알았어, 미안해. 내가 예민했어. 화장실 휴지통이야, 니 맘대로 해. 어차피 살림하는 사람 마음인데. 결혼해서 화장실에 휴지통이 있던 없던 상관없어.

그런데 너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좀 져주면 좋잖아. 일단 그 자리에서는 나 맞춰주고, 달래 주고, 그다음에 다 헤어진 다음에 싸우면 안 돼? 여자가 돼서 분위기도 맞추고 다독여주고 그래야지.”


“여자가? 왜? 왜 그래야 하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종업원 앞에서 괜히 화장실 휴지통 가지고 트집이나 잡고. 분위기 이상하게 만든 거 오빠가 잘못한 거잖아. 그거 잘못한 거 지적한 게 잘못한 거야?”


“휴...... 넌 또 이런 식이지. 그냥 내 편 들어주면 안 돼? 그 따위 휴지통 내가 싫다면 없애면 되고 그냥 알았다고 고개 끄덕여주면 내가 욱할 것도 없잖아. 그리고 종업원 감정보다 내 감정이 더 중요한 거 아냐?”


“들어줄만해야 들어주지. 괜히 쓸데없는 거에 짜증 나는 걸 왜 애꿎은 휴지통에 푸는데? 그러면서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기나 하는 걸 내가 왜 다독여주는데? 게다가 오빠야 말로 지은이까지 앞에 있는데 그렇게 굳이 나한테 이겨먹고 싸움을 걸고 짜증을 내야겠어?”


“너야말로 굳이 창수가 앞에 있는데 따박 따박 말대꾸해야겠냐?”


민영이가 차를 세웠다.


“내려.”


“뭐?”


“내리라고. 싸우자고 덤비는 사람 태울 자리 없어.”


현욱이가 민영이를 쏘아보고는 내렸다.


민영이가 그대로 차를 출발했다.


부천으로 가는 길은 막히지 않아서 금방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민영은 부장님께 혼자 먹는다고 말하고 근처 커피숍으로 갔다. 그리고 지은이에게 전화를 했다.


“지은아. 나야.”


“그래, 어제 잘 들어갔어?”


“응, 어제는 미안했어.”


“됐어. 우리도 다 싸워. 신경 쓰지 마. 괜찮아. 우리가 뭐 한 두 번 본 사이도 아니고. 이미 학생 때도 다 봤던 거잖아. 호호.”


“고마워, 하필이면 니 생일에 이렇게 돼서 더 미안하다.”


“생일은 무슨. 나는 간만에 외출한 것만으로도 좋았어. 신경 쓰지 마. 화해는 했어?”


“아침에 집 앞에 기다리고 있었어. 근데...... 또 싸웠어. 휴...... 그냥 헤어져야 할까 봐.”


“뭐야...... 화장실 휴지통으로 싸우고 헤어지면 너무 웃기잖아.”


“그것 때문이 아냐...... 어쩌면 집에 인사 오기로 한 거 취소된 다음부터 마음이 식었던 것 같아. 어제도 어이없게 싸우고 나니까. 이 사람이랑은 아닌가 싶어서. 게다가 화해하자고 만나 놓고 또 싸우고...... 요즘엔 맨날 싸워. 즐겁지가 않아.”


“그럴 때가 있어. 나도 연애만 8년째야. 그동안 싸우고 헤어지고 어휴 말도 못해. 그래도 그냥 내 인연이구. 내 사람이니까 받아주는 거지 뭐......

근데... 꼭 화해하라고 말은 못 하겠다.”


“왜?”


민영이는 지은이의 마지막 말에 도리어 기분이 상해서 물어봤다.


“솔직히 말해서 현욱 오빠 전재산이 3천만 원이라는 것에 진짜 놀랐어. 물론 남자 나이 31살에 혼자 벌어서 그 정도면 작은 거는 아니지. 사실 정말 잘 모은 거야. 나도 그런 돈 벌어본 적 없으니까.

하지만 그걸로 결혼하고 살기엔 쉽지 않아. 그리고 너도 친정 부모님 생각해봐.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시겠니? 내가 애 낳고 나니까. 부모 마음 더 잘 알아서 하는 말이야. 그리고 니가 남이 아니니까 하는 말이고. 정말 내 동생이면 뜯어말렸어.”


민영이는 화가 났다. 감히 내 사랑을 돈으로 재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민영이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돈 때문에 헤어지진 않아. 그럴 거면 연애도 안 했어. 단지 난... 오빠가 이렇게 쪼잔하고 소심하고 그런 게 견딜 수 없어서 힘들 뿐이야. 대화가 없어지는 거, 믿음이 흔들리는 거 그런 것 때문이야. 돈 따위에는 안 흔들려.”


“그래...... 뭐 나도 그런 시절이 있긴 했는데...... 아무튼 부모님 생각해. 미리미리 잘 하고. 금쪽 같이 기르셨는데 속상하게 만들지 말아.”


“알았어.”


민영이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자기야 말로 돈 없는 부모 때문에 속상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부모가 고맙고 어쩌고 하는 모양새가 웃겼다.


지은이랑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핸드폰이 울렸다. 현욱이었다.


“여보세요.”


“누구랑 이렇게 오래 통화해? 어디야?”


“나 점심 먹고 있어. 지은이랑 통화했어. 어제 미안하다고.”


“잘 했어. 어디야? 같이 점심 먹자.”


“응? 어딘데?”


“나 니네 회사 앞.”


민영이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니 현욱이가 있었다.


“고개 돌리면 보이는 커피숍에 있어.”


현욱이가 민영이를 발견하고는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왔다.


“왜 샌드위치 먹어? 밥을 먹어야지.”


“여기 밥집이 별로 없어. 그냥 간단하게 샌드위치 먹고 일하는 게 가장 좋아. 오빠도 먹으려면 사와.”


“그래.”


현욱이가 샌드위치를 사들고 왔다. 샌드위치 포장을 뜯으며 현욱이가 말했다.


“나 그렇게 버리고 가놓고 아무 생각도 없어? 연락도 안 하고. 안 미안해?”


“바빴어. 미안해.”


“됐어. 됐다. 나도 잘한 거 없다는 거 알아. 그냥 퉁치자. 미안하고. 일단 먹자. 배고프다.”


현욱은 샌드위치를 먹었다. 민영이도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었다. 샌드위치를 반쯤 먹은 현욱이가 커피를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나 창수랑 일 하려고. 창수가 사장이던, 내가 직원이던 상관없을 거 같아. 내가 자본이 없으니까. 자존심은 상하지만 기회인 것도 맞는 말일 거야. 카카오톡도 투자받고, 게임 회사도 투자받고 그러는 거잖아. 나도 그렇게 투자받는 거지 머. 창수랑 같이 일하는 거, 창수 비위 맞추는 거 쉽지는 않겠지만 그 정도야 할 수 있을 거야. 내일 창수랑 학원 자리 몇 개 보기로 했어.”


“그래.”


‘그러던지.’ 민영이는 속으로 말했다.


“열심히 할게. 5월에는 학원 오픈할 수 있을 거야.”


“그래.”


민영이는 마지막 한입을 먹었다. 그리고 자리를 정리했다. 현욱이는 아직 덜 먹은 상태였다.


“나 이제 들어가 봐야겠어.”


“그래? 벌써? 10분 남았는데 좀 이따 가지.”


"일도 많고, 우리 사무실이 아니니까. 조금만 늦어도 눈치 보여. 게다가 다들 같이 밥 먹는데, 나만 따로 먹으니까 나를 좀 특이하게 보거든. 그런 사람들한테 꼬투리 잡히고 싶지 않아. 아빠 체면도 있으니까 열심히 해야지. 천천히 먹어.”


“그래. 몇 시에 퇴근해?”


“모르지.”


“그럼 난 집으로 갈게. 여긴 기다릴 데가 별로 없더라.”


“그래 그게 좋을 거야. 그럼 가. 퇴근할 때 연락할게.”


민영이가 일어났다.


점심 식사를 끝난 직원들이 자리에 앉아 오후 근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영이는 책상에서 칫솔을 꺼냈다. 미스김이 말을 걸었다.


“아까 지나가다가 봤어요. 남자랑 있던데 애인이에요?”


사람들이 민영이를 쳐다보았다. 민영이가 당황스러움을 숨기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아... 아니요. 그냥 친구예요. 애인 없어요.”


“그래요? 에이~ 아닌 거 같은데. 호호. 요즘 말로 썸 타는 관계인가요? 호호호 뭐든 부럽네요. 점심같이 먹을 남자도 있고.”


“그냥 친구예요. 부럽긴요.”


민영이는 대충 얼버무리며 급한 대로 칫솔을 입에 넣고 거품을 조금 만들며 서둘러 화장실에 갔다.


저녁 10시, 민영이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왔다. 거실에 들어가자마자 털썩 소파에 앉았다. 핸드폰을 보고 그제야 현욱에게 지금까지 연락 안 한 것을 깨달았다. 민영은 현욱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 이제 집에 왔어. 피곤하고 정신없어서 이제 연락해.]


[그래? 얼른 쉬어, 고생했어. 이번 주말에 영화 볼까?]


[봐서]


민영이는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핸드폰에서 카톡 알람 소리가 났지만 민영이는 듣지 못하고 계속 텔레비전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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