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예 사이에서 저울질하기
제45조(비상점멸표시등) 자동차에는 다음 각 호의 기준에 적합한 비상점멸표시등을 설치하여야 한다.
1. 모든 비상점멸표시등은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일 것
2. 비상점멸표시등의 작동기준은 '비상점멸표시등의 작동기준'에 적합할 것. 다만, 초소형자동차는 '초소형자동차 옆면 표시등의 설치및광도기준'의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타이어에 펑크가 난다면 일단 비상등부터 켜고 봐야 합니다. 차선을 밟거나 가드레일에 들이받아 차를 멈춰 세우면 교통규범에 어긋나지만, 예외상황이니 괜찮습니다. 또 엠뷸런스가 위중한 환자를 싣고 갈 때는 두 차선 가운데로라도 비집고 들어가 병원으로 빨리 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긴급한 돌발상황에서는 평소와 달리 센스 있고 부드럽게 대처해야 합니다.
권(權)은 융통성입니다. 속된 말로 유도리입니다. 비상등을 켜 위급한 상황에 대처합니다. 서로 부딪히는 두 가지 예 사이에서 도에 맞는 예를 고르거나, 예에 어긋나더라도 도에 맞게 해야 권입니다. 도와 예를 저울 위에 올려놓으면 도쪽으로 무겁게 기웁니다. 예는 사람을 도에 맞게 하기 위해 만든 규범이기에 상황에 맞춰서 조금씩 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권을 무턱대고 자주 쓰면 예의 의미가 지워지고 사회의 어지러워집니다. 그래서 군자는 융통성 있게 실천하면서도 예에 맞고, 권을 쓰더라도 예와 크게 부딪히지 않습니다.
권은 자칫 무도로 비치기 쉽습니다. 권과 무도를 구분하는 잣대는 인의도덕을 따르는지의 여부입니다. 만약 신호 앞에서 딴짓하다가 녹색등을 놓치면 무도이지만,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나 어르신이 횡단보도 건너고 있어서 기다리다 신호가 적색등으로 바뀌었다면 분명 권입니다. 예를 지키려 고집을 부리다가 도에 어긋나서는 안 되기에 권을 써야 합니다. 인의를 해치면서까지 예를 어긴다면 그저 무도일 뿐입니다. 군자는 도를 따르며 예를 지킬 때는 칼 같지만, 예를 지키는 이유가 도를 따르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않습니다.
진심 상 37,
孟子曰... 執中無權 猶執一也 所惡執一者 爲其賊道也 擧一而廢百也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 중간을 잡는 것이 도에 가까우나, 중간을 잡기만 하고 저울질함이 없으면 한쪽을 고집하는 것과 같다. 한쪽을 고집하는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도를 해치기 때문이니, 하나만 시행되고 나머지는 모두 버려진다.”
이루 상 51,
淳于髡曰 男女授受不親禮與 孟子曰禮也 曰嫂溺則援之以手乎 曰嫂溺不援 是豺狼也 男女授受不親 禮也 嫂溺援之以手者 權也
순우곤(淳于髡)이 물었다. “남녀 간에 물건을 직접 주고받지 않는 것이 예(禮)입니까? ”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예입니다.” “그렇다면 제수(弟嫂)가 우물에 빠졌을 경우에 손을 잡아 구해주어야 합니까? ” “제수가 물에 빠졌는데 구해주지 않는다면 이는 승냥이입니다. 남녀 간에 물건을 직접 주고받지 않는 것은 예이고, 제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아 구원해 주는 것은 권도(權道)입니다.”
이루상 52
曰今天下溺矣 夫子之不援何也 曰天下溺援之以道 嫂溺援之以手 子欲手援天下乎
“지금 천하가 도탄에 빠졌는데, 선생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 “천하가 도탄에 빠졌을 때에는 도(道)로써 구원해야 하고, 제수가 물에 빠졌을 때에는 손으로써 구원해야 하니, 선생은 손으로 천하를 구원하고자 합니까? ”
권이란 저울질입니다. 중용과 엇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에서는 같지만, 중용은 평범하고 권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중용은 '너무하지 않은' 도를 쓰고 권은 '너무한 상황에서조차' 도를 찾습니다. 중용이 '철듦'이라면 권은 '철에 맞춤'입니다. 중용은 과정과 결과가 모두 도와 예에 맞지만, 권은 결과가 도에 맞아도 과정은 예와 어긋날 수 있습니다. 중용을 쓸 수 없는 불가피한 때에 권을 씁니다. 교통규범에 맞춰 핸들을 요리조리 돌려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비상등을 켜야 합니다. 급정거든 풀액셀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를 지켜야 합니다. 권은 군자가 도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패, 와일드카드입니다.
길을 가다가 주변사람이 심장이 멈춰 쓰러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을 시전해 살려야 합니다. 일상에서는 마음대로 입을 맞추면 성추행범으로 쇠고랑을 찰 수도 있고, 평소에 갈비뼈를 부러뜨리면 강력범으로 감옥에 갇힐 수도 있지만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하니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압박해야 합니다. 군자는 예를 버리면서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짓누르고 거리낌 없이 입을 맞추지만 도는 지켜냅니다. 사람에게 마음대로 손을 대지 않는 것은 도가 아니고 예이기 때문에 권은 당연히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기웁니다. 예 안에 도가 있더라도 사람을 살리는 도가 더욱 깊습니다.
양화 5,
公山弗擾以費畔 召 子欲往 子路不說曰 末之也已 何必公山氏之之也? 子曰 夫召我者 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계씨의 가신 공산불요가 비읍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부르니, 공자께서 가려고 하셨다. 자로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가실 곳이 없으면 그만이지, 하필 공산씨에게 가시려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부르는 자가 어찌 괜히 부르겠는가? 만일 나를 써주는 자가 있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네.”
양화 7
佛肹 召 子欲往 子路曰 昔者 由也聞諸夫子 曰 親於其身 爲不善者 君子不入也 佛肹 以中牟畔 子之往也 如之何子曰 然 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진晉나라 중모 땅 읍내 필힐이 공자를 부르자, 공자께서 가려고 하셨다. 자로가 말하였다. “옛날에 제가 선생님께 들으니 ‘자신이 직접 불선한 짓을 하는 자의 무리에는 군자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필힐이 지금 중모를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선생님께서 가려고 하심은 어째서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네. 그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지. 그러나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던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으니! 희다고 말하지 않던가,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내가 어찌 박과 같겠는가? 어찌 박처럼 한 곳에 매달려서 먹지 않고 지낼 수 있겠는가?”
힘으로 나라의 권력을 빼앗은 '필힐'과 '공산불요' 등의 정치인은 공자에게 함께 해달라고 바랐습니다. 일종의 스카우트 제의입니다. 필힐과 공산불요는 무도한 사람입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덕을 쓰지 않고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군자는 무도한 사람의 무리에 들어가지 않지만, 도덕을 이루기 위해 힘을 빌릴 수도 있습니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는 예가 어지럽게 뒤섞이고 도가 보이지 않던 때입니다. 공자는 도에 맞지 않게 권력을 갖게 된 사람이라도 써서 도를 되찾으려 한 것입니다. 무도한 사람을 써서 도를 얻으려 했으니 권입니다.
공자는 제자 자로가 말림에도 그들에게 가려고 했습니다만,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의와 중용을 지킨 겁니다. 권을 써서 큰 도를 이룰 수도 있겠지만, 일이 잘못되어 큰 무도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무단횡단하는 한 사람을 죽게 하지 않기 위해 비상등을 켜고 인도를 향해 들이박았는데, 멀쩡히 걸어가던 사람 열을 죽이게 된다면 얼마나 터무니없을까요? 군자는 악에 물들지 않더라도, 선한 뜻으로 했던 행동이 소인에 의해 사람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공자는 권을 말하고도 의와 중용을 골랐습니다. 혼자만의 해석으로 상황을 멋대로 받아들이고 권을 마구 써서는 안 됩니다. 권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이 도에 맞지 않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군자에게는 도덕이 중요하지 권 자체가 뜻깊지는 않습니다.
미자 8,
謂虞仲夷逸 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 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
공자께서 우중과 이일을 평하셨다. “숨어 살면서 말을 함부로 하였으나 몸은 깨끗하게 지켰고 스스로를 폐함은 권에 맞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들과 달라서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
자한 29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설 수는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어도 함께 권을 행할 수는 없다.”
권으로 저울질하기란 무엇이 되었건 간에 반드시 어렵습니다. 덕을 지키고 도를 따르는 일은 가깝고 쉽지만, 권 앞에서는 군자라도 미적지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희대의 질문인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에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러나 군자라면 위기모면책인 권을 쓰기보다도 의와 중용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권은 어찌 보면 뒷문이며 지름길입니다. 도라는 큰길이 막혀있다면 먼저 어떻게 길을 꿇을 수 있을까 고민해 보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조리 실천해 본 다음에 작은 길이 있나 살펴봐야 합니다. 모범운전자는 비상등을 켜야 할 법한 때에도 언제나처럼 쉽게 대처합니다. 군자는 권을 쓰는가 싶다가도 꼭 중용을 잃지 않습니다. 덕을 지키고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권에 능숙하되 익숙해지지 않도록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