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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형 은행원 Aug 17. 2019

가고 싶지 않은 술자리를 웃으면서 거절하는 방법 2

직장이라는 이 길고 험한 여정에 많은 모험과 배움이 있기를

이 글은 가고 싶지 않은 술자리를 웃으면서 거절하는 방법이라는 글에서 이어지는 다음 글입니다. 앞의 글을 읽지 않으셨다면 미리 꼭 읽어주세요.




도대체 내 엉덩이가 가진 가능성의 한계는 어디란 말인가? 그가 다시 내게 와 술을 마시자고 했다. 그토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거부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또 한잔하자며 엉겨 붙는 그가 무서울 지경이다. 당연히 나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그가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어 내 앞에 내민다. 명분이다. 그에게는 오늘의 자리가 부서의 화합과 사기진작을 위한 술자리라는 명분이 있었다. 빌어먹을. 나는 필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아기 동화책 읽어주기' 카드 외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이 카드로 그의 명분을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2차까지는 괜찮았다. 유명한 맛집이었고 여기저기서 초빙된 참석자들 모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1차와 2차에서 꽤나 즐겁게 술을 마셨다. 문제는 2차가 끝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간 다음 발생했다. 집에 가려는 나를 그가 붙잡더니 좋은 곳이 있다고 - 거기에 가서 쌍쌍바를 하나씩 먹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 취해서 안된다고 했다. 순간 그가 목소리를 높이며 내 팔을 움켜잡았다. 그 손을 뿌리치자 그가 아까 한번 써먹은 명분을 다시 꺼내어 내게 들이밀었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12시가 넘어 먹는 쌍쌍바가 봉긋한 엉덩이에 미칠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영향을 도대체 알고나 있는 것인가? 나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싫다'고. 이건 무너뜨릴 수 없는 원칙이라고. 그러나 그가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시들어빠진 명분을 치켜들고 나를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가 많이 취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나도 취해있었다. 그가 다시 내 팔을 움켜쥐고 당겼다. 순간 내 입에서 ‘싫다’보다는 ‘꺼져’에 가까운 표현이 튀어나와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실수였다. 그 옆에서 막내가 우리의 실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에 놓여있던 귄위가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충격을 받아 말문이 막힌 그를 뒤로 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똥물을 닦아냈다. 그와 실랑이 하는 중에 내 몸에 똥물이 많이도 묻어 있었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그들이 내게 자꾸만 술을 먹자고 하는 것은 어쩌면 내 엉덩이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느낌. 나는 몸에 묻은 똥물을 닦아내며 그 느낌이 확신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내 엉덩이가 아니었다. 그는 술자리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내가 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술자리를 거부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게 집요하게 술자리를 강요했다. 명분 따윈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결국 그것에 굴복해 따르는 과정을 바라보며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했던 것이다. 거기서 만족감을 얻었던 것이다. 내 거부권이 강한만큼 만족감은 더 컸으리라. 이렇게 하니 왜 그들이 왜 정작 술자리에서 내 엉덩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엉덩이가 아니었다. 그는 내게 직장내 갑(甲)질을 한 것이었다.


차라리 엉덩이 었다면 나는 용납할 수 있다. 그가 내 엉덩이에 손을 대기 위해서는 손모가지 전체라는 리스크를 정직하게 감수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원하게 그 갸냘픈 손모가지를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비겁하게도 안전하게 갔다. 그는 내게 갑질을 시도했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리스크가 없다. 누군가 왜 그랬냐고 묻는다고 할지라도 그에게는 부서의 화합과 사기진작이라는 완벽한 명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내가 아랫 직원들에게 쌍쌍바도 한번 사주지 못하느냐고 반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엉덩이와 갑질의 근본적인 동기와 그것이 주는 악영향은 동일하게 저열했다. 다만 갑질의 경우 엉덩이와 달리 그의 손모가지가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는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나에 대한 평가권과 인사권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욕지기가 나왔다. 나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인간에게 불안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다행인 점은 이런 날은 글이 조금 더 잘 나온다는 점이다. 나는 글을 쓰고 피시방에 게임을 하러 갔다. 하지만 내일은 다시 회사에 가야 한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잠을 깊이 자지 못했다.




사실 조금 싱거웠다. 회사에 출근을 하자마자 그가 나를 불러 세워 지난밤의 사건을 추궁했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는 그에게 나는 사과의 말을 전해야 했다. 미안하다고. 내가 당신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다고. 이 말을 마치고 나는 그의 권위를 다시 주워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자신의 권위가 완전히 부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퍼져나갔다. 문득 나는 그 또한 내내 불안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나는 해야 할 말을 했다. 나는 그에게 설명했다. 내가 거부한 것은 그의 권위가 아니었다고. 나는 그가 가진 경험과 직책과 권한을 인정한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내가 그에게 가하는 부당함일 것이다. 나는 내가 거부했던 것은 그가 나에게 가한 부당함이라고 설명했다(차마 갑질이라는 단어는 쓰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내게 가한 부당함의 종류를 이야기했다. 그는 그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조차 전에는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다지 해롭지 않고 재미있는 관습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말을 마치고 나니 개운했다. 그가 내게 직장 내 예의범절과 승진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종료되었다. 과거에도 그와 나 사이에는 몇 차례의 강렬한 마찰이 있었다. 몇 주간 말을 주고받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필요에 의해 어찌어찌 어설프게 관계가 봉합되곤 했다. 이번의 사건은 그 봉합이 다시 터진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이번의 거부권 행사는 정말이지 깔끔하게 먹힌 것 같다. 언제고 그 부당함들은 다시 나를 시험하기 위해 다시 찾아올테지만 당분간은 괜찮다.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나는 그에게 사과했지만 그는 내게 사과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왜 그를 따라가 쌍쌍바를 먹지 않았던 것일까? 거기에는 정말 무수히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글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책임져야 할 두 개의 글이 있었다.


첫 번째 글은 내가 쓴 글이었다. 예전에 나는 나는 이제 더 이상 월요일이 우울하지 않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부당한 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더 이상 당신을 찾아오지 않는다'라고. 나는 내가 쓴 이야기와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날 부당함을 느꼈을 때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 과정이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똥물이 튀겼고 숙취와 후회가 난무했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세상을 가득 채울 것 같던 부당함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이다.


지금 나는 더 강한 확신을 가지고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부당한 것을 거부할 때 그것들은 더 이상 당신을 찾아오지 않는다고. 당신 주변에 부당함이 넘쳐나고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당신의 책임도 있는 것이라고. 만약 당신이 그것들에 지치고 억눌려 어디론가 떠나는 환상에 빠져있다면 직시해야 한다. 당신에게도 분명 그것들을 거부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당신이 가고자 하는 어느 곳에도 부당함은 넘쳐날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두 번째 글은 코맥 매카시가 쓴 '더 로드'라는 소설이다. 소설의 말미에 나온 아들과 아빠의 대화 부분이 생각난다. 지옥으로 변한 세상에서 아들이 아빠에게 묻는다. 용기를 냈던 적이 있었냐고. 아빠의 대답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질문만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아 지금 이 순간도 내게 답을 요구한다. 용기를 냈던 적이 있느냐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할 수 없었다. 두려웠던 순간은 있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꼈지만 참아내고 꿋꿋이 일상을 지켜낸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내다. 내게도 인내의 순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었다. 인내가 쉽다거나 가치가 떨어진다고 폄훼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용기를 낸 적이 있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나는 인내했다고 답변할 수는 없다. 용기와 인내는 다르다. 용기는 인내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용기를 냈던 것은 언제인가? 나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쥐어짜 낸 용기를 기억한다. 금융권 총파업의 날이었다. 나는 그날 손모가지 전체를 걸고 그 파업에 참석했다. 파업은 참담하게 실패했고 내가 걸었던 손모가지 전체가 깨끗하게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이 아프지는 않았다. 개운했다. 날아간 손모가지 자리에서 새로운 손이 자라났다. 나는 그 손으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 나는 대답할 수 있다. 내가 용기를 냈던 일상의 수많은 순간들에 대해서, 그 순간마다 날아갔던 손모가지에 대해서, 그리고 거기서 자라난 새로운 손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기쁘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두렵다. 결국 나는 어느 순간 거부권을 남발한 댓가로 키클롭스에게 잡아먹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나를 위로한다. 나는 지금 직장생활이라는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직장생활은 고대의 오디세이아에 못지 않은 참혹함과 설레임과 보상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에 못지 않은 용기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이 길고 긴 여정에서 나는 무엇을 얻기를 가장 원하는가? 나는 나의 직장생활에서 더 많은 모험과 배움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을 통해 더 성장한 나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내가 가진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 붙일 수 밖에 없다. 부당한 것들을 거부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 불모지일지라도 상관없다. 그곳에서도 나는 참으로 기쁠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것이므로. 이렇게 생각하면 두려움은 모두 사라진다.


나는 당신 또한 그곳에서 나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타카(Ithaca)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콘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콘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 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 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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