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거리에 만들어 놓은 빈터
골목의 끝에서 만나는 곳
숙소가 있는 작은 골목을 나오자마자 만나는 구시가의 남서쪽에 위치한 Campo d’Fiore.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이 로마의 구시가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크고 작은 광장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마치 이 도시 전체가 수많은 광장들을 잇는 거대한 그물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광장을 이해하지 않고는 고대 로마를 이야기할 수 없다.
고대에는 신전, 기원후에는 교회와 성당으로 대표되는 신을 섬기는 공간을 중심으로 도시의 주요 기관들이 둘러서 지어졌고 그 가운데 빈 공간은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정치적, 경제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광장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구조는 도시의 기본적인 형태가 되어 왔다. 언뜻 공통점이 없는 것 같지만 유럽의 광장을 보면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 구조를 떠올리게 된다. 안방에서 사랑방으로, 사랑방에서 부엌으로, 뒷간으로 각 방을 잇는 텃마루가 둘러싸고 있는 안마당(안뜰_아름다운 우리말)은 그 집의 광장이었을 것이다. 각 방에서는 각자의 목적에 따라 먹고 자고 업을 이어가지만 그 중심에는 가족들이 모이고 잔치를 치르고 아이들이 뒹굴고 뛰노는 마당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오래된 구축 아파트들이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작은 방들을 구석에 배치한 통짜 구조를 택하고 있는 건 공간의 효율성을 고려한 것이겠지만 이러한 전통 가옥의 구조를 염두에 두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함께하는 시간이 줄고 개인적인 공간에 대한 필요가 늘어나면서 요즘 지어지는 아파트들은 마루를 줄이고 각 방의 사이즈가 커진 대신 조각조각 나뉜 복도식 집이 되었달까, 구석구석의 공간을 개성 있게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세련된 구조일지 몰라도 공용 공간에 대한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다.
즐비한 카페에 둘러싸인 중앙 분수대 주변에서 여유를 즐기는 일반적인 광장과 달리 캄포는 매일 재래시장이 열리기 때문에 광장이라기보다는 중앙 시장의 한복판을 지나는 느낌이다. 때문에 광장 전체를 메운 그늘막 아래 호객 행위를 하는 소음으로 가득 찬 낮보다 아침저녁으로 시장이 철수한 뒤 쓰레기 조각들만 뒹구는 텅 빈 광장이 오히려 이곳의 본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화려한 화장을 지운 고전 미인이 그제야 청순한 자태를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광장의 복판에서 한눈에 보이는 여러 골목길 중 나갈 골목을 고르는 건, 미로 찾기에서 시작할 길을 고르는 것 같다. 주요 관광지로 가는 골목은 반복해서 지나다닐 수밖에 없고 요즘은 구글 지도 덕분에 골목을 걷는다기보다는 핸드폰 화면의 파란 점 따라가는 다른 길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러 옆골목으로 한번 가볼까? 어? 아까 그 길을 또 만났네, 나는 너무 신났지만 무더위와 갈증에 지친 딸램이 퉁퉁 부은 얼굴로 '아까 왔던 길이자나' 슬슬 짜증을 내는 통에 다시 구글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다 보면 이름 모를 작은 성당 앞에 이게 광장인가? 싶은 앞마당 규모의 광장도 나오고 어느덧 작고 예쁜 카페가 즐비한 나보나 광장을 만났다.
몰랐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분수조차 미술사 책에나 나오는 위대한 베르니니의 조각 작품인 이곳에서는 이게 누구의 작품인 것보다 고풍스러운 방에 어울리는 가구 같은 느낌(일반인들은 모르는 장인이 만들었을)? 그저 이 공간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구조물 중 하나로 보일 뿐이다. 우리가 지나온 대부분의 광장은 지금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카페와 상점으로 가득한 공간이 되었지만 시대를 품은 건축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심에 서면 과거에 그곳을 메웠던 사람들의 활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물론 로마에도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해 만들어져 무솔리니 시대에 열병식에 사용된 베네치아 광장과 같은 거대한 광장이 있고 우리에게도 서울의 중심인 시청 앞 서울 광장이 있다. 하지만 이들 광장은 도시가 만들어지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이미 완성된 도시에 무언가 과시하고 싶거나 대규모 행사를 위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이니 본질적으로는 다른 의미의 광장인 것이다. 규모나 화려함 면에서 월등히 뛰어났음에도 그닥 정이 가지 않았던 건 아마도 사라져 가는 자연스런 만남과 일방적 소통에서 오는 상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더 크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그 본질을 잃었을 때는 결국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기엔 한계가 있나 보다.
인위적인 게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뉴욕의 한복판에 자리한 대규모 공원인 센트럴 파크는 뉴욕이 도시를 재정비할 때 시민들에게 자연 친화적인 휴식의 공간을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비싼 노른자 땅에 건물들을 빼곡히 채워도 시원찮을 판에 공원이라니..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이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필요한 것이다"라는 조언이 받아들여진 것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규모와 조경, 구조물 모두 철저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에도 그 바탕엔 눈앞의 이익보다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일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화면 빨리 돌리기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뉴욕의 시민들에게 정신적, 육체적 휴식처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나아가 이는 현대 도시공원 설계의 전형적인 표본이 되어서 이제는 웬만한 도심의 중심엔 공원을 갖추고 있지만 그 공원이 주는 느낌이 도시마다 사뭇 다른 것 또한 본질에 대한 진실한 접근의 차이일 것이다.
이야기가 많이 돌아갔지만 결국 인간을 배려하는 마음,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마음…어? 르네상스네? 어쩌면 르네상스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단순히 인간이 중심이 된 문화이기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겠다.
다양한 광장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
그런 의미에서 광장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이었던 거야. 우리가 오늘 걸은 수많은 골목길들은 모두 다른 길처럼 느껴지지만 그 공간을 잇는 길이었던 거지. 그래서 엄마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모든 길은 광장으로 통한다’라고 표현하고 싶어. 앞으로 우리가 걷는 이 길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흔적들을 통해 이탈리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을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