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랜 유물 같은 시집을 펼쳐 들어 본다. 우리 집에 책장 두 개에 시집만 빼곡히 꽂혀있다. 이건 내가 읽은 게 아니라 소유주는 우리 엄마 되시겠다. 엄마와 딸이 어쩌면 이렇게 취향이 다른지, 식성도 다르고 감성도 다르다. 예전에는 그 책들에 손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이제야 하루에 한 번은 시를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자며 손을 뻗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서정주 시집을 집어 들었다. '시인'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윤동주, 서정주, 김소월 뭐 그런 분들이니, 그냥 오늘은 딱히 어떤 시를 떠올린 것이 아니라 그냥 손 가는 대로 시집을 꺼내 들었다. 꺼내고 보니 서정주 시집이었던 것이다. 집에 있는 서정주 시집을 얼핏 보니 세 권이 눈에 띄었다.
『말의 선물』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이 좋다. 사실 나도 그러면서 커왔으니 말이다. 책의 존재만으로도 영향을 받아온 것이다.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시집을 꺼내 들어 읽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시를 많이 접한 듯한 이 느낌은 뭘까.
확실히 책은 읽는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은 그것을 읽어보고 싶어 하는 사람의 것이다. 통독해야 한다는 규칙도 없다. 책 자체를 사랑스럽게 느낄 수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의 말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책을 손에 든 의미는 충분하다.
……
사람은 언젠가 읽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읽을 수 없는 책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거기에 쓰인 내용이 아니라 그 존재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읽을 수 없는 책과도 무언의 대화를 계속한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과 비슷하게, 그 존재를 멀리 느끼며 적절한 시기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말에도 인간의 인생을 바꾸기에 충분한 힘이 숨어 있다. 쓰는 사람의 일은 오히려 생애를 바쳐 하나의 말을 전하는 것 같다고도 지금은 생각한다.
『말의 선물』 60쪽
그러면 세 권의 시집을 한 권씩 살펴봐야겠다.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푸르른 날 / 서정주
이 책은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 23권으로 출판사는 미래사다. 책 제목은 '푸르른 날'이다. 그 시를 대표로 뽑았나 보다.
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1991년의 책이고 책값은 3,000원이다. 이상하게도 시 감상은 디지털말고 아날로그 감성의 결정체다. 시집을 펼쳐 들어야 제맛이 나는 듯하다. 100일 동안 어떻게든 예전 책을 펼쳐들며 시와 만나는 시간을 보내야겠다.
서정주대표시집
연꽃만나고 가는바람아
이 책은 좀 더 오래전에 발간된 서정주 대표시집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아』이다. 1989년에 출간된 책이다.
자서(自序)
여기에 내가 50여 년 써온 내 모든 시 작품 가운데서 100여 편을 내 스스로 골라 한권의 책을 만들기로 하고, '89년판미당자택시선'이라고 이름붙인다. 지금 내 나이가 일흔네 살 하고 또 한 달쯤 되었으니, 물론 이만큼한 나이의 눈에 따른 자택시선(自擇詩選)인 것이다.
이 선택을 끝내고 난 소감, 그런것은 말하지 않기로 한다. 이건 독자들의 생각이나 느낌에 따를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출처: 서정주 시집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아』 중에서)
서정주의 시집을 자발적으로 꺼내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바로 이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알게 되고 나서였다. 이 시를 읽으신 동네 어르신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무언가 시원시원한 결론이 아니라서일까. "그래서 만났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하시면서 투덜거리셨던 어느 순간 그분들이 떠오른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의 명시
이 책은 다른 시집들과 달리 '컬러판'을 자랑하는 책이다. 1987년 한림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인데 가격은 3,000원이며 양장본이다.
언제 꽂아두었을지 모를 책갈피도 눈에 띈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작가책갈피이다.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_프란츠 카프카
나도 그 '도끼'를 찾기 위해 오늘도 책의 세상에서 허우적거린다.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 서정주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라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
포근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그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는 소리 …….
큰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들이 오보록이 도란거리며 안기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산도 산도 청산도 안기어 드는 소리 ……
서정주의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을 읽다 보면 위로받는 느낌이다. 이 시는 내가 찾아 읽은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나에게 훅 들어왔다.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에 몇 번쯤 책의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은 경험이 있지 않을까. 스스로 책을 고른 게 아니라, 책이 자신의 품으로 뛰어드는 경험을 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말의 선물』 (89쪽)
이 표현처럼 이 시가 나의 품으로 뛰어들어오는 경험을 했다고 할까. 그래도 겨울에, 눈발이 날릴 때에 더 와 닿는 시이니, 이제 다음 겨울까지 잘 담아두어야겠다. 오늘은 살짝 욕심부려 시 세 편을 감상하는 시간을 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