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말하며 시작할까. 나는 살짝 들떠있다. 엄청난 옛 유물을 발굴해냈다고 할까. 사실 작년에 정리하면서 책 또한 많이 내보냈다. 나에게 이미 쓰임이 다한 책들을 내가 다 끌어안고 있기에는 버겁기 때문이다. 읽을 책도 많고 읽어야 할 책도 많고 시간도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재독을 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렇게 솎아내면서, 오히려 최근 책은 누군가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서관이나 병원에 기증할 수 있었지만, 오래된 책은 받아줄 사람이 없으니 그냥 두었고, 이 책들은 책장 한편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천년 세월을 기다리는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야 시선을 보낸다. 어쩌면 내가 100일 동안 시를 읽겠다고 계획하지 않았으면, 이 책은 더 오랜 세월을 조용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으리라. 오랜 세월을 버텨낸 책이다. 지금껏 살아있는 책이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못 보낼, 보내고 싶지 않은 책이다. 바로 이 책 『영랑, 용아 시선』이다.
이 책은 1970년 9월 25일 초판인쇄, 1970년 9월 30일 초판 발행한 책이다. 정가 650원이다. 그러니까 1970년 발행 책이니 50년은 된 책이다. 그 세월 동안 내지는 낡고 색이 바래고 너덜너덜 해지며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버텨왔다.
이 안에 보면 동경 유학 시절 두 분의 모습이라며 사진도 있다. 1927년 도쿄에서 찍은 사진이다. 김영랑 시인의 시는 학창 시절에도 접했기에 익숙하지만, 박용아 시인은 잘 모르겠다 싶으면 「떠나가는 배」를 보면 '아!' 하면서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떠나가는 배 / 박용아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헤살짓는다
앞 대일 어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간다
1949년 경회루에서 찍은 사진이다. 요즘 스냅사진의 느낌이다.
약력을 보자.
본명은 윤식. 1903년 1월 16일 전남강진에서 출생함.
휘문학교를 거쳐 일본 토오쿄오 아오야마학원에서 수학 함.
…(중략)…
1950년 9.28 수복을 며칠 앞두고 파편을 맞아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심.
같은 한글이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우리에게 익숙하게 변화해왔다. 이 책에 쓰인 그대로 적어보되 한자는 한글로 바꾸어서 적어보았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서름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한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내 마음 아실 이 /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냐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 달어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 김영랑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이 고운봄 길우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시를 읽다 보니 오래된 책 냄새가 난다. 요즘 새책 냄새만 주로 맡다가 오랜만에 옛 서적을 들춰보는 시간을 보낸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에 가면 고서 있는 곳에 가서 아무 책이나 펼쳐보던 날들이 있었는데, 코로나로 도서관을 안 가다 보니 그런 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다. 오늘은 이 책으로 그 감성을 대신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