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깊이 생각하지 말고, 지금 딱 떠오르는 시를 말해보라. 혹시 윤동주의 「서시」 혹은 「별 헤는 밤」이 떠오르지 않는가. 사실 내가 그랬다. 이것은 마치 '노란 꽃' 하면 '개나리', '빨간 꽃' 하면 '장미'가 떠오르는 것처럼, 한국인의 대표 시인은 물론 다른 분들도 많지만 그중 '윤동주'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전 윤동주의 「서시」, 「반딧불」, 「봄」, 「굴뚝」을 감상해보았다면, 오늘은 거기에 이어 「자화상」, 「별 헤는 밤」을 감상하고자 한다. 그 시들을 빼놓으면 이상하게도 윤동주의 시를 감상하다가 만 듯한 느낌이 드니 말이다. 오랜만에 책장에 꽂혀있는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꺼내들어보았다.
1991년 미래사에서 출간한 시집이다.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중 33번째로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선보였다. 한국 현대시가 100년의 역사를 헤아리게 되었고, 이 선집은 한국 현대시가 걸어온 형극의 역사를 재음미하면서, 문학사적인 측면의 체계적인 정리를 위해 엮은 것이라고 한다.
김소월로부터 박노해까지, 이 선집은 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 이념과 진실 등 다양한 주제와 다기한 기법을 보여준 한국 현대시의 정수를 담았습니다. 개인의 서정을 노래하고 민족의 정서를 구가하는 힘찬 고동과 맥박을 한자리에 모은 것입니다.
이 선집은 나날이 메마르고 각박해지는 현실 속에서 시의 영역을 확대하고, 인간의 영토를 확장하는 일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약속으로 엮어진 것입니다.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성원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한국대표시인100인 선집을 펴내며 편집위원 정한모,권두환,최동호,권영민)
여기에서 '나날이 메마르고 각박해지는 현실'이라는 수식어가 눈에 띈다. 그때와 비교해보면 지금이 더 메마르고 각박해진 듯하지만, 그 당시에도 우리 삶은 각박했고, 시가 그 메마른 현실을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 지금도 어쩌면 더 각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때이니 만큼, 감성을 채워주는 데에는 시가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
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
습니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