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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몽 Mar 27. 2021

정지용 시 「유리창」 「백록담」 「비」 감상

무언가를 할 때, 그러니까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으면서 막상 하고자 결심하고 나면, 조금씩만 하기에는 아쉬워져서 무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집안 살림이다. 책상 정리를 하다 보면 바닥도 한번 닦고 싶고 자꾸 더러운 것이 눈에 띄어 이것저것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간다. 반찬을 만들 때에도 한 가지만 후딱 하면 될 것을 몇 가지 욕심내다가 난장판이 된다.



요즘 나에게 시 감상이 그렇다. 처음 계획은 100일 동안 하루에 한 편씩, 100편의 시를 감상하기로 가볍게 생각했으면서 막상 시작하고 나니 하루에 한 편만 감상하기가 아쉬워져서 서너 편씩은 꼭 보게 된다. 지금 안 하면 다시는 못할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굳이 처음 생각처럼 하루에 한 편씩만 보고 나머지는 나중으로 넘길 필요는 없겠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도 내 스타일이니 말이다. 그러니 하루에 서너 편 감상하기도 하고, 같은 시인의 시를 이틀 연달아 감상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고 싶을 때,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면 말이다.



오늘도 정지용의 시 감상을 이어간다. 하루 만에 끝내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예전에 정지용의 「향수」를 읽으며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라는 표현에 감탄한 적이 있다.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는지, 그런 시를 감상할 수 있다니! 그러니 오늘 하루만 더 정지용의 시 감상을 하기로 한다.





유리창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니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백록담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 마루 우에서 모가



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花紋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난



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嚴古蘭, 환약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



어섰다.




3



白樺 옆에서 白樺가 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白樺처럼 휠 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



에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



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



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



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



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이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송아지는 움매-움매-울었다. 말을 보고



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毛



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



리, 먼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솨-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



넌출 기어간 흰 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용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식물을 새기며 취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촐한 물을 그리어 산맥 우에서 짓는 행



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이겨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



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



겨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



차 잊었더니라.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죵죵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가리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낯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초기시의 이미지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개성을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지용은 산수시의 영역, 근본적으로는 한시의 정신적 전통에 눈을 돌린 것이다. 식민지시대 말기를 살던 그가 동양고전에로 침잠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시를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광폭한 힘에 지배되는 현실의 억압 속에서 그가 산수의 세계 속에 숨어서 그래도 버릴 수 없어 시를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도 배일도 못한 그가 조선시를 쓴다는 그것만으로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는 시 속에서만이라도 산수로 돌아가 세속의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142쪽, 최동호 문학평론가)



정지용의 시 「유리창1」을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접했다. 아들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 쓴 것이라고 알았을 때, 마음이 싸르르 아려왔다. '슬프다'라고 외치지 않고 오히려 절제된 표현에서 더 큰 슬픔이 느껴진 것이다. 「백록담」은 내가 제주에 와서 보니 더 잘 보이는 부분이 있다. '도체비꽃'이 '수국'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 '도체비꽃이 낮에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라는 표현도 재미있다. 그리고 '제주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는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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