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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몽 Mar 24. 2021

이육사 「청포도」 「절정」 「광야」 「꽃」 감상하기

쉿! 어제 오후에도 오늘 새벽에도, 아니 간 듯 다녀온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가시리 녹산로 유채꽃 길이다. 꽃이 절정을 이루기도 했고, 봄날 그 길을 달린 기억만으로도 살아갈 힘을 얻기 때문이기도 했고, 가야만 하는 이유는 100가지는 더 만들 수 있을 듯하다. 특히 이번 주말에 비가 내린다고 하니 더 열심히 계획을 세워본다. 꽃 지기 전에 열심히 만나보아야 하니까.



차에서 내리지 않고 운전만 하면서 흘끔흘끔 바라보다 보니,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마음에만 담았다. 사진은 예전에 실컷 찍은 걸로 만족하고, 눈으로 마음으로 담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사실 차에서 내리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올해에는 코로나 때문에 주정차 금지 팻말이 곳곳에 세워져 있어서 내릴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는 데다가, 바람이 엄청 많이 분다. 가시리 녹산로에 풍력발전소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름답게 꽃만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을 피우기 위해 시련을 견뎌내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이육사의 「절정」 「꽃」 이런 시들이 떠오른다. 아, 혹시 계절도 안 맞고 막 갖다 붙인 느낌이라고? 나도 안다. 내 마음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오늘은 기어이 이육사의 시를 감상해보아야겠다.



책장에 찾아보니 이육사의 시집이 이렇게 두 권이 있다. 한 권은 요즘 매일같이 들춰보는 미래사의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18권이 '이육사의 광야'이며, 또 한 권은 청목사의 이육사 시집 '청포도'다.





신기한 것은 이 두 권 모두 1,2부에는 시, 3부에는 수필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필이 수록된 것을 처음 보는 듯하니 이 책을 이제껏 안 보았다는 말이다. 청목사에서 발행한 이육사 시집 『청포도』 속의 산문에는 미래사 책에 없는 내용이 더 있어서 흥미롭다.


벌써 4년 전 가을 일이다. 그때도 가을날씨이고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었다. 석초 형이 시골서 오라고 하였고 가면 백제 고도인 부여 구경을 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먼저 서천으로 가서 석초집에서 2,3일 지낸 후 부여로 가게 되었다. (고란(皐蘭) 중에서)


여기서 '석초 형'이란 '신석초' 시인을 말한다. 이런 글을 보니 인간미를 느꼈다고 할까. 박물관을 보고 숙사로 돌아와 두 분이 주거니 받거니 술잔도 기울이고, 그 분위기가 상상된다. 특히 '석초가 황국을 따다가 술잔에 띄워 주며 남쪽으로 있는 창문을 열고 달빛을 맞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이런 분위기 낭만적이고 멋지다.



두 분의 친분은 '신석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석초형, 내가 지금 있는 곳은 경주읍에서 불국사로 가는 도중의 십리허에 있는 옛날 신라가 번성할 때 신인사(新印寺)의 고지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이다. 마침 접동새가 울고 가면 내 생활도 한층 화려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군이 먼저 편지라도 한장 하여 주리라고 바래기는 하면서도 형의 게으름(?)에 가망이 없어 내 먼저 주제넘게 호소치 않는가?
석초형, 혹 여름에 피서라도 가서 복약이라도 하려면 이곳을 오려무나, 생활비가 저렴하고 사람들이 순박한 것이 천년전이나 같은 듯하다. 나는 삼개월이나 이곳에 있겠고 또 웬만하면 영영 이 산밖을 나지 않고 승이 될지도 모른다. (신석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시를 읽으려고 펼쳐든 책인데, 수필이 눈에 들어와서 먼저 읽어보았다. 우리들의 인간사와 그리 다르지 않은, 인간미가 느껴져서 친밀하게 다가왔다.






* 김춘수의 「꽃」을 포스팅하고 보니 바로 이육사의 「꽃」도 떠올랐다. 잘 몰라도 상관없고 알아도 다시 한번 감상해보자.


* 시험 문제 안 풀어도 되니 배웠던 그 정답은 잊고, 시 자체만 오롯이 감상해보자.



* 시의 표기는 미래사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18 이육사 『광야』에 따른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쟎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





이육사는 서정성과 아픔을 함께 쏟아놓은 절절함이 시에서 넘쳐난다. 예를 들어, 그냥 '꽃이 아름답다'라는 겉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고통, 아픔 등 생명력까지 함께 볼 수 있다. 그의 시를 보며 가슴이 아려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꽃을 감상하든 세상 어떤 것을 보든, 그 내면의 생명력까지 바라보기로 하며 오늘의 감상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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