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니 나만의 실천 100일을 통해 나는 정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처음 100일은 물건 정리, 다음 100일은 여행 사진과 여행 추억 정리, 이번 100일은 책장 정리를 이어가고 있다.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때도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절실히 깨닫는다. 그동안 책장 정리를 하면서 주로 안 보는 책을 골라서 처리해야 할 것을 빼는 작업을 위주로 했다면, 지금은 이 책들 중 시집을 쓱 훑어보면서 '오늘은 어떤 시인의 시를 감상해볼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발견했다. 우리집에 정지용의 시집이 한 권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정지용의 시는 두 번의 포스팅으로 살펴보았지만, 책이 다르다. 오늘은 범우사에서 발행한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을 집어 들어 감상해본다.
이 책의 맨 앞에는 이승하 시인의 '이 책을 읽는 분에게'가 수록되어 있다. 오늘은 이 글을 읽으며 그 시대 문학의 흐름을 어느 정도 짚어본다. 그 당시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정지용의 시풍은 어땠고, 그다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큰 틀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백록담》은 정지용이 1941년, 나이 마흔에 문장사를 통해서 낸 두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은 1946년에 백양사에서 재판을, 1950년에 동명출판사에서 3판을 찍었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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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은 유럽에서 발원한 모더니즘을 배워 이 땅에 시로써 선보인 최초의 시인이다. 일본 유학길을 떠나 도시샤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영문학과에 들어간 1926년, 유학생 회지인 《학조》에 〈카페 프란스〉 〈슬픈 인상화〉 〈파충류동물〉 등의 시를 발표하는 것인데, 이들 작품은 우리나라 모더니즘 시의 효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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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이 《백록담》을 간행한 1941년은 일본이 미국 및 연합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해이다. 섬나라 일본은 "바다로! 바다로!"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유학생 최남선은 일본의 해양 진출의 의지를 알아차리고 자신의 시에 이를 접목시켰다. 7·5조와 후렴구의 불완전성을 그대로 지닌 채로. 최남선의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읽고 근대시(혹은 자유시)에 눈을 뜬 많은 시인들이 바다를 향해 눈길을 돌려 "서구로! 서구로!"를 부르짖을 때 정지용은 홀로 산으로 올라간다.
《백록담》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시인들이 외세의 파도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높은 산에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보기로 했다는 것. … 자괴감에서 헤어나 정지용은 인적 드문 산에 올라가 깊은 사색에 잠긴다. 40년대 초는 우리 문학이 총체적으로 흔들리던 암울한 시대, 암흑의 연대였다. 그 시대 문인들에게 민족적 주체성이나 자기정체성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래저래 문인들은 자기를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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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은 바다에서 한라산, 장수산, 금강산 등 산을 향한 시적 등반의 과정을 통해 시정신의 일대 전환을 꾀한다. 이국취미에서 동양정신으로, '바다'라는 외향적 세계 탐험에서 '산'이라는 내면적 세계 탐색으로, 특히 서구 모더니즘에서 동양 정신주의로의 전환은 결국 우리 것을 찾는 작업이며 나 자신을 찾는 작업이었다. 정지용은 《백록담》에서 좋은 한시나 시조에서 맛볼 수 있는 절제된 언어 미학을 추구하였다. 고독[心]과 고통[身]을 떨쳐버리지 못하면서도 힘든 산행을 통해 인간을 우주에 일치시키는 견인불발의 의지를 여러 편의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소월 식의 자연과의 거리 두기가 아니라 자연에 몰입하여 자아와 세계를 합일시키는 희유한 예를 정지용에게서 찾아볼 수 있음은 우리 시문학상의 큰 자랑이다.
이처럼 절제되고 유현한 시정신을 본받은 이들이 청록파였다. 5년 뒤에 나온 《청록집》에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준 시집이 《백록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록담》을 찬찬히 읽어본다면 독자와 언론의 외면과 비평가의 무관심에 봉착한 이 땅의 시인들이 위기를 극복할 그 어떤 묘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11년 7월
이승하(시인 · 중앙대학교 교수)
(출처: 백록담 정지용 범우사)
오늘은 작가 연보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1913년, 12세에 동갑과 결혼을 했고, 22세에 휘문고보 5년제를 졸업했으며 《휘문》 창간호 출간. 이때 작품 <향수>를 씀. 1928년 3월 22일, 27세 때 옥천군 자택에서 장남 구관 출생. 1929년 28세, 이 해 12월 아이를 잃은 슬픔을 표현한 시 <유리창>을 씀. 1930년 29세, 3월 김영랑의 권유로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하여 《시문학》에 작품 발표함.
1939년 38세, <장수산> <백록담> <춘설> 등의 작품 발표함. 1942년 41세. <창> <이토>를 발표하고 이후 해방까지 문단 활동 중단함. 1945년 44세에 10월 휘문중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문과과장이 됨. 1947년 46세, 8월 경향신문사 주간직을 사임함. 이후 서울대, 동국대 등에서 시를 강의함.
1948년 47세, 2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녹번리(지금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의 초당으로 옮겨 서예를 즐기며 소일함. 같은 달 박문출판사에서 지용의 산문을 묶은 《지용문학독본》이 간행됨. 1950년 49세. 6·25 전쟁이 터지고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이 끝나고 수복한 서울에서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현재 그의 사인은 납북되던 중 1950년 폭격에 휘말려 사망하였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1988년 1월 몇 사람을 제외한 납·월북 작가의 작품이 해금됨. 이후 《정지용전집》이 간행되고 '지용회'가 결성되고 '지용문학상'이 제정됨. 1989년 5월 정지용의 고향인 충청북도 옥천에서 지용의 시비가 세워짐. 이후 해마다 5월에 옥천에서 정지용 시인을 기리는 문학행사로서 '지용제'가 열리고 있다.
오늘은 작품만 감상하는 것보다는 작가연보에 더 시선이 갔다. 작가연보를 살펴보니 작가의 작품을 좀 더 넓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폭포>를 감상하며 며칠 전 꿈이 생각났다. 사실 그런 꿈은 예전부터 종종 꿔왔다. 높은 데에서 떨어지기 전에 저 밑을 바라보며 망설이는 꿈 말이다. 바닥이 닿지 않을 정도로 한참을 떨어진 적도 있고, 겁이 나서 망설이던 적도 있었다. 나는 낭떠러지 앞에서 겁을 내던 폭포였던 것일까. 문득 장자의 호접몽이 생각난다. 잠에서 깨어난 장자가 생각했다지 않은가. 장자가 나비였던 것인지, 나비가 장자였던 것인지 말이다. 나 또한 내가 폭포였던 것인지, 폭포가 나였던 것인지 이 시를 읽으며 생각에 잠긴다.